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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리포트] “적정 이윤 안다, 내려라” vs “정부가 다 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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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전지적(全知的) 정부’. 요즘 물가 잡기에 전력 투구하는 정부를 보면 3인칭 소설의 ‘전지적 작가’가 떠오른다. 마치 신과 같이 전지전능한 존재 말이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심리와 향후 전개될 사건 흐름 등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최근 정부는 개별 기업의 원가 수준을 잘 알고 있거나 다 알아야 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특정 기업이 가격을 편승 인상하는지, 아니면 정말 인상 요인이 있는지 정부는 신통하게 이를 꿰뚫고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과연 그럴까. 또 그게 바람직한 정부의 역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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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과 같은 물가불안 시기에는 가격 동조·편승 인상 과정에서 담합 등 불공정 행위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 1월 25일 기자간담회)

 공정위 고위 간부는 “최근의 가격 인상은 과다한 동조 인상이나 편승 인상이 대세”라며 김 위원장의 이날 발언을 부연 설명했다. “예컨대 5% 정도 인상으로 충분한 A사, 7% 인상을 고민하던 B사, 10% 인상을 생각하던 C사가 모두 동일하게 8%를 인상한다면 A사와 B사는 과다하게 동조 인상하는 것이다. 또 이를 직접 원료로 하는 관련 품목은 물론 아무 상관도 없는 다른 품목까지 덩달아 가격을 인상하는 게 편승 인상이다.”

 공정위가 A·B·C사의 가격 동조·편승 인상에 ‘선제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들 회사의 원가 정보와 개별 회사의 담합 의도를 공정위가 미리 훤히 알고 있어야 한다. 1970년대 정부가 시장가격을 통제하던 시절 경제기획원 물가국장을 지낸 강경식 전 부총리는 “(정부의 제품에 대한) 정확한 원가계산은 언뜻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 “백화점·대형마트 등의 판매수수료를 공개해 수수료 경쟁을 유도하고자 한다. 업태별·상품군별 수수료 수준을 올 2분기에 발표할 예정이다.”(김 위원장, 2월 9일 유통업체 최고경영자 간담회)

 김 위원장은 “중소 납품·입점업체들은 백화점·대형마트 등 대형 유통업체의 판매수수료가 높다는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며 “이는 대형 유통업체의 판매수수료 결정 과정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중소 납품·입점업체가 판매수수료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수용 가능한 수수료 수준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면 당사자 간 충분한 협의를 통해 판매수수료가 합리적인 수준에서 결정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업계는 당장 불만을 토로했다. 판매수수료는 원가로서 영업비밀에 해당하고, 판매수수료 공개는 과도한 시장개입이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공정위는 즉각 반박자료를 냈다. 공정위가 공개하려는 것은 업태별 평균 수수료와 각 업태에서의 상품군별 수수료 범위(range)라서 기업의 영업비밀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를테면 3대 백화점의 상품군 잡화(피혁·구두·장신구)에 대한 평균 수수료율이 A사 29%, B사 25%, C사 21%라고 할 때 이를 ‘백화점 잡화군의 수수료율 수준은 21~29%’라고 공개하겠다는 거다. 직접적으로 유통업체의 실명을 공개하는 것도 아니고 개별 회사의 수수료를 밝히는 것도 아닌 만큼 정보 공개를 통한 경쟁 촉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해명이었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는 “일반에 공개하지 않더라도 회사별 수수료 정보를 공정위가 다 알아야 한다는 거 아니냐”라고 말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9일 기자간담회에서 물가 정책을 시장친화적으로 펴겠다고 강조했다.

기업의 팔을 꺾어 물가 인상을 억제하기보다 시장 왜곡을 고치고 진입규제를 풀어 공급을 늘리는 시장기능을 활용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러면서도 공정위의 최근 행보에 대해 “악역이 하나쯤 있어야 질서가 바로잡히지 않겠느냐”며 공정위 편을 들었다.

통신사와 정유사를 정조준해 요금 인하를 압박하기도 했다. “통신 3사가 지난해 3조6000억원의 이익을 냈고, 정유사도 지난해 3분기까지 2조3000억원의 이익을 냈다. 가격 인하요인은 충분하다고 판단한다.” 이익을 많이 냈으니 요금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은 정부가 이들 업체의 ‘적정이윤’을 알고 있지 않으면 하기 힘든 주장이다.

 최광 한국외대 교수는 지난주 경제학 공동학술대회에서 “공정위의 ‘물가기관’ 선언은 본말이 전도된 발상이다. 거악(巨惡)을 파헤쳐야 할 대검찰청 검사가 좀도둑 잡겠다며 골목길에서 잠복근무하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정부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다 보니 정부와 시장 간의 역할에 혼선이 생긴다는 주장도 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선 정부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이율배반적인 주장이 나온다. 한편으론 문제만 생기면 정부더러 모두 해결하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의 낭비와 비효율을 지적하며 가능한 한 시장 기능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정부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 언론 보도가 인플레 심리를 외려 부추긴다는 불만도 나온다.

특히 정부는 ‘인플레의 구조화’를 걱정한다. 물가 불안이 인플레 심리를 자극하고 경쟁적인 가격 인상으로 이어질 경우 자칫하면 노동계의 임금 인상 요구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 정부는 외환당국을 방불케 하는 ‘구두 개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최근 10여 년간 물가가 워낙 안정되다 보니 인플레에 대한 경각심이 약해졌다”며 “최근 정부의 물가 정책은 인플레 심리를 조기에 차단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서경호·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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