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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55) 대통령의 긴급 호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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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미국을 방문한 육군참모총장 백선엽 장군이 1953년 5월 말 조지아주 포트베닝의 미 보병학교에서 유학 중인 국군 지휘관들을 만나 환담하고 있다. 전쟁을 치르고 있던 대한민국은 53년 당시 미국에 적지 않은 군 장교들을 보내 보병과 포병·통신 등 다양한 분야의 군사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제공]


기자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소개할 에피소드가 있다. 나는 한국전쟁을 수행하면서도 늘 기자들과 함께 있었다. 미군과 유엔군 틈 사이를 누비고 다니던 외국 종군기자를 비롯해 조국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눈물과 한으로 취재하던 한국 기자들도 전선에서 나와 호흡을 함께했었다.

“자네, 이제 그만 돌아와야겠네” #미 지휘참모대학 교육 받던 중 #태평양 너머 경무대 긴급 전화 #이승만의 승부수 이번엔 뭘까 …

 그래서 나는 기자들의 그칠 줄 모르는 취재 욕구를 잘 이해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가끔 엉뚱한 질문을 하는 기자들도 있었다. 내가 뉴욕을 방문했을 때도 그런 기자 하나가 있었다. 그는 내게 “동양 사람들은 대개 키가 작고 안경을 쓰면서 금니를 했는데, 당신은 왜 그런 모습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 질문을 받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동양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데, 어떻게 일률적으로 겉모습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런 말에는 대답할 수 없다”며 언짢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질문한 기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때의 동양인에 대한 서구인의 인상은 대개가 그랬다. 더구나 공산주의 국가의 침략을 받아 전쟁을 겪고 있는 낯설고 보잘것없는 나라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이 별것이 있을까라는 선입견도 작용했을 것이다.

 상대를 잘 알지 못하는 부지(不知)의 상황에서는 오해와 편견이 나올 수 있다. 그런 오해와 편견은 더 큰 오류를 생산한다. 서로 교류가 적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오해와 편견을 불식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지는 길밖에 없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방미 일정을 이어 갔다. 조지아주 포트베닝의 보병학교와 통신, 헌병학교를 방문할 때는 그곳에 유학 중이던 국군 장교들을 대거 만날 수 있었다. 미국인의 오해와 편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으나 우리는 그렇게 꾸준히 미국의 발달한 문명과 기술들을 열심히 익히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사정이야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난했다.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철저하게 지키는 이승만 대통령은 해외에 나가는 공무원과 군인의 경비를 10달러 수준까지 직접 결재했다. 없이 사는 가난한 나라의 공무원은 스스로 검소함을 철저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그의 소신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악착같이 ‘학습의 기회’를 부여잡았다. 미군이 그런 기회를 제공했고, 국군 지휘부는 거기에 한 사람이라도 더 올라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적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국군 장교들이 미국에서 서양의 뛰어난 기술과 시스템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돌아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커다란 위안을 받았다.

 시찰하는 일정이 끝난 다음에 나는 캔자스주에 있는 지휘참모대학에 입교(入校)했다. 2주일 동안 그곳에서 최고지휘관 교육을 받을 예정이었다. 지휘참모대학에는 이미 이종찬·장도영·최영희·박병권·정래혁·안광호 등 육군 장성들이 교육을 받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반갑게 해후했다.

 지휘참모대학의 교장은 행크 호디스 소장이었다. 그 또한 나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1951년 7월 첫 휴전회담의 유엔군 대표로서 나와 함께 회담에 나선 인물이었다. 그는 나를 위해 특별한 교육과정을 마련해 뒀다. 학생은 나 한 사람이었으나 교관은 20명 정도였다. 그 교관들이 나를 위해 속성으로 전문 교육을 하는 과정을 짜 뒀던 것이다.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작전이론에서부터 병참과 군수·통신에 이르기까지 분야별 교육과정이 모두 망라돼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과정을 마칠 수 없었다. 열흘쯤 지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급한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대통령이 한국에서 나를 직접 호출한 것이었다. “자네, 그쪽 형편이 급하지 않으면 이제 그만 돌아와야겠네.” 어느 날 받아 든 전화통에서는 대뜸 그런 내용의 대통령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나는 어느 정도 사태가 미묘하게 돌아간다는 감을 잡은 적이 있었다. 대통령의 전화를 받기 이틀 전인가 그랬다. 나는 미국 신문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그즈음에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방미 중인 백선엽 장군을 소환할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나갔었다.

 대상은 나뿐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보도한 그런 기사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유학 중인 한국군 장교들을 모두 불러들일 수도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런 기사를 보면서 휴전을 앞에 두고 한국과 미국 사이에 다시 불협화음이 생겨난 것으로 직감했다.

 여러 수(手)를 내다보면서 정치를 해 나가는 이 대통령의 승부사적 기질이 또 한번 발휘될 조짐이었던 것이다. 내가 워싱턴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만나 한국과 미국의 상호방위조약을 언급해 ‘원칙적인 동의’라는 말까지 받아 냈으나, 나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국면(局面)을 이끌어 가는 대통령의 생각은 어느덧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당연히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그 전화를 받고 나는 “바로 들어가 찾아뵙겠습니다”고 대답했다. 미국 신문들은 이 대통령의 돌발적인 그런 조치가 대통령이 줄곧 반대해 오던 휴전회담과 관련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나 역시 그런 분석에 동감했다.

 그러나 다행이었던 것은 짐을 꾸려 귀국길에 오르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라는 점이었다. 다른 장교들은 그런 명령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이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 중인 육군참모총장 한 사람만을 상징적으로 불러들이는 선에서 일단 조치를 취하고 나섰던 것이다. 나는 간단하게 짐을 꾸려 비행기에 올랐다.

 6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미군이 제공한 군용기 편으로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떠났다. 그리고 이어 그곳에서 팬암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 넓고 큰 망망대해(茫茫大海), 태평양이었다. 그 푸른 바다 저편의 대한민국 해역(海域)에서는 다시 커다란 격랑(激浪)이 일 조짐이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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