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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96) 금문도 포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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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도 방위군 사령관 후롄은 황포군관학교와 미국 육군참모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군인이었다.19세 때 북벌전쟁 참전을 시발로 홍군토벌·항일전쟁·국공전쟁을 거치며 실전 경험이 풍부했다. 마오쩌둥은 “여우와 호랑이를 섞어 놓은 인물”이라 평했고 전사 연구가들에게 “부하의 재능을 자신의 생명처럼 여겼던 야전지휘관, 사람을 잡아먹기라도 할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금문포전 시절 기자들과 만난 후롄(왼쪽에서 셋째). 김명호 제공

마오쩌둥은 금문도와 마조도를 점령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8·23 금문도 포격 1개월 전인 1958년 7월 14일, 이라크에서 무장혁명이 발발했다. 왕정이 무너지자 미국은 중동 주둔 미군들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레바논에 출병했다. 미국에 이어 영국은 요르단을 점령했다. 소련과 프랑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마오쩌둥은 혁명을 수출하지는 않았지만 중동의 혁명세력들을 내심 지지했다. 페르시아만으로 향하던 미 6함대의 화력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대만해협을 주목했다.

마오는 금문도 포격을 여름 휴양지 베이다이허에서 직접 지휘했다. 가장 치열했던 초기 1주일간 현장에서 포격전을 지휘해야 할 예페이를 옆에 데리고 있었다. “이건 집안일이다. 가법(家法)에 의해 처리해야 한다”며 “미국인이 있는 곳을 피해서 포를 때릴 수 있는지”를 궁금해했다. “보장하기 힘들다”는 답변을 듣자 “미국인 희생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느냐”고 물었다. 당시 대만에는 미 중앙정보국요원 1만여 명이 상주하고 있었다. 군에도 미국 고문관들이 쉬지 않고 들락날락했다. “피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들은 마오는 아무 말 없이 옆방으로 들어갔다.

이틀 만에 나타난 마오의 얼굴에는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평소 하던 식대로 해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예페이는 마오의 의중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국공전쟁의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그런 것 같지 않았다. 펑더화이나 린뱌오 같은 전쟁 귀신들도 뭐가 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예페이는 마오의 물음에 답하거나, 지시사항을 샤먼의 부하 지휘관들에게 전화로 전달하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8월 23일 오후 5시30분, 30㎞에 달하는 샤먼의 해안 포대에서 459문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80여 척의 함정과 200여 대의 전투기도 목표를 타격했다. 금문도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통신망이 파괴되고 금문방위사령부 지휘부에 있던 부사령관 3명은 직격탄을 맞았다. 그중 한 명은 항일전쟁의 영웅이었다. 사령관 후롄(胡璉)은 국방부장 위다웨이(兪大維·현 상하이 시 서기 위정성의 백부)와 5분 전에 산책을 나가는 바람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무릎을 쳤다. 미국을 끌어들여 중공과 끝장을 낼 생각이었다. “잘 됐다”며 하오(好)를 세 차례 연발했다. 후롄에게 반격 명령을 내렸다. 후롄은 눈을 부라리거나 이를 악물고 호언장담을 일삼는 지휘관이 아니었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시절 마오쩌둥으로부터 “미련하고 용감한 장군이 아니다. 국민당 지휘관 중에서 가장 영리하고 교활하다. 경계해야 할 인물이다”는 평가를 여러 번 받은 지장(智將)이었다. 군인이 적에게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샤먼의 해방군은 공격 20분 만에 금문도에서 날아온 포탄 세례를 받았다. 통계에 의하면 23일 하루 동안 해방군은 4만7000발의 포탄을 금문도에 퍼부었고 국민당 군은 12만 발을 응사했다. 이튿날도 포격은 계속됐다. 전투기 34대가 바다에 떨어지고 각종 함정 23척이 침몰하는 등 공중전과 해전도 치열했다.

미국은 포격을 주도한 중공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분주했다.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중동으로 향하던 6함대의 절반을 7함대가 있는 극동 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만해협에 7척의 항공모함과 대형 순양함 3척, 구축함 40척이 집결했다. 미군 정찰기와 전투기들이 대만의 비행장을 메웠고 1차로 해병대 3800 명이 대만 남부에 상륙했다. 순식간에 대만과 연합작전에 돌입할 태세를 갖췄다. 중동 지역의 긴장도는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의 속내를 제대로 못 읽기는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베이징에서는 연일 군중대회가 열렸다. 구호는 단 하나, “금문도와 마조도를 해방시키자”였다. 타이베이도 마찬가지였다. 거리 건물 할 것 없이 “반공대륙”이라는 플래카드와 현수막이 난무하고 땡볕에 군중이 도로를 메웠다. 양쪽 모두 먼저 공격을 당했다며 열을 올렸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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