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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풍속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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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여름 철새인 백로와 가을에 여무는 연밥. 현실에선 결코 한데 모을 수 없는 두 생물이 옛 민화엔 함께 단골로 등장한다. 연꽃이 진 자리에 탐스럽게 영근 연밥을 배경으로 백로 한 마리가 한가로이 노니는 그림, 바로 일로연과도(一鷺蓮果圖)다. 단번에(一路) 소과·대과에 연달아 등과하라(連科)는 말과 발음이 똑같아 과거 합격 기원용 선물로 인기 만점이었다. 요새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에게 ‘철썩 붙으라’며 떡과 엿을 안기는 풍습과 매한가지다.

 과거와 수능은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시험 한 방에 인생의 많은 부분이 좌우되는 점만 해도 그렇다. 송나라 황제 진종이 선비들 격려차 지은 권학가(勸學歌)를 보면 흡사 ‘30분 더 공부하면 남편 직업(마누라 얼굴)이 바뀐다’는 고3 교실 급훈 같다. ‘부자가 되려면 기름진 밭을 살 필요가 없느니/책 속에서 천 석 곡식이 절로 쏟아져나올 것이다…/아리따운 아내를 얻을 인연 없음을 탓하지 말 일이니/책 속에서 옥 같은 미녀가 걸어나올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 과거 급제만 하면 창창한 미래가 보장된다는 꼬드김이다.

 둘 다 편법과 부정이 끊이지 않은 것도 흡사하다. 『승정원일기』는 숙종 38년 서울 사는 명문가 자제들이 출신 지역을 속이고 과거를 치른 사례를 전한다. 당시 장원과 차석을 차지한 송인명과 이중인이 장본인이다. 서울과 지방의 학력 격차가 워낙 크다 보니 지방 출신이면 합격이 쉬운 점을 악용한 것이다. 지역균형선발 전형을 노리고 시골로의 전학도 불사하려는 요즘 세태나 다름없다. 입시 경쟁 과열이 빚은 사달이다.

 ‘사상 최악의 수능’이라는 2011학년도 대입 시험이 어제 치러졌다. 올해 수험생 숫자는 10년 내 최대인 71만여 명.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인 ‘미니 베이비 부머’ 92년생이 고3인 탓이다. 거기다 내년부터 시험 범위에 포함될 ‘공포의 미적분’을 피하려고 다들 하향 안전 지원을 할 테니 경쟁률이 최고로 치솟을 거라며 온 나라가 난리다.

 ‘대입 시험날 비행기 이착륙 미루고 증시 개장도 늦추는 이상한 나라’(월스트리트 저널)라는 비웃음도 소용없다. ‘대학 합격→취업 기회→인생 성공’이란 틀이 바뀌지 않는 한 수능은 해마다 ‘국가적 대사’로 되풀이될 게다. 그나저나 어렵게 대학 가도 ‘천 석 곡식과 옥 같은 미녀’는 꿈에 불과하단 얘긴 언제까지 숨겨야 하나.

신예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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