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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강성현] 장따궈(章大國)의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예찬

중앙일보

입력

장따궈(52세)는 대학자 장쉐청(章學誠, 1738~1801)의 직계 손자로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는 차이위안페이(1868~1940) 예찬론자다. 오랜 세월 동안 저장성 사오싱(紹興)에 위치한 차이위안페이 옛집(故居)을 굳게 지키고 있다.

그의 직함은 교수, 기념관장, 저장성 역사인물 연구소장 등 다양하다. 그러나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무명의 향토사학자라 부르는 것이 보다 적절할 듯싶다. 그는 요즈음에도 이소룡이 ‘정무문’에서 화려한 발차기를 선보일 때 신었던 싸구려 검정 헝겊신을 즐겨 신고 다닌다. 검박함이 몸에서 묻어난다.독특하게 턱수염만을 기른 작은 키의 장따궈는 이마에 땀을 닦아가며 힘주어 말한다.

“만약에 차이위안페이라는 사상적 거목이 없었더라면 루쉰(1881~1936)도, 마오쩌둥(1893~1976)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이위안페이의 경력은 화려하다. 진사, 한림원 관리, 동맹회·광복회 회장, 교육부 장관, 베이징대학 총장, 중앙연구원 원장 등 그가 일생에 걸쳐 역임한 공식 직함 만도 무려 26개에 이른다. 그에 대한 호칭은 실로 다양하다. ‘학계의 비조’, ‘미학의 선구자’, ‘근대의 공자’ ‘호호(好好) 선생’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다 ‘진사 출신 혁명가’란 호칭을 하나 덧붙이고 싶다.

차이위안페이는72세의 생애 동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진사 출신으로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으나, 그가 애써 이룩한 한림원의 ‘철밥통(鐵飯碗)’을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렸다. 자신의 밥줄을 스스로 끊어 버린 것이다. 그는 베이징의 차이스커우(采市口)에서 참수를 당한 이른 바 ‘무술 육군자(戊戌 六君子)’의 한 사람이었던 탄스퉁(譚嗣同, 1865~1898) 죽음을 몹시 애석해하였으며, ‘변법유신운동’의 좌절에 심한 울분을 느꼈다.

일본으로 망명한 캉유웨이(康有爲,1858~1927),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의 행보에 분노를 느껴, 한림원의 관리직을 사임하고 혁명가의 길에 올랐다. 신해혁명이 성공하자 임시정부 초대 교육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며, 곧 바로 루쉰을 교육부로 불러들인다.

이 후 열세 살 아래인 그와 평생의 동지로서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는다. 자신 보다 4년 먼저 타계한 루쉰의 장례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루쉰 전집 편집위원장으로서 그의 사후까지 철저히 보살폈다.

1917년 무렵 베이징 대학 총장에 취임한 차이위안페이는 ‘사상의 자유’, ‘인재 제일주의’ 원칙을 내걸고 ‘부패와 수구’의 요람이었던 대학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는 닥치는 대로 인재를 불러모았다. 리따자오(李大釗, 1888~1927), 천뚜슈(陳獨秀,1879~1942), 컬럼비아 대학 박사 후스(胡適,1891~1962), 루쉰 등이 그들이었다.

이리하여 “차이위안페이가 남으로 가면 인재가 남으로 몰려오고, 북으로 가면 북으로 몰려든다”는 말이 유행하였다. 당시 약관의 마오쩌둥은 베이징 대학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이 대학의 마르크스연구회 등에 적극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은 차이위안페이 총장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지 아래 자신의 학문적 이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신청년』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문화운동이나, 5.4 애국운동의 사상적 진원지는 차이위안페이 교장이 주도하는 베이징 대학이었다. 현재 베이징 대학은 ‘위안페이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대학 개혁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오늘날의 학자들도 이구동성으로 베이징 대학 역사 이래 ‘최고의 개혁 총장’으로 그를 꼽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의 베이징 대학은 차이위안페이 선생이 이끌었던 당시에 비해 대학의 개혁 면에서나, 학문과 사상의 자유면 그리고 인재 초빙 등 모든 면에서 한 참 뒤처진다.”

인재를 모으기 위해 절치부심하였던 그의 노력 중 재미있는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해 보기로 하자.

만 26세의 청년학자 량수밍(梁潄溟, 1893~1988)은 불교 및 인도철학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으며, 차이위안페이 교장은 우연히 그의 논문을 접하고 그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 무렵 베이징 대학 학생 중에는 량수밍 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들이 부지기수였다. 오만하리만치 자신감에 넘쳐있던 량수밍을 아버지뻘 되는 차이위안페이가 직접 찾아갔다.

차이위안페이는 베이징 대학 교수 초빙을 단호히 거절하는 25살 아래의 량수밍 설득에 나선다. 나이가 어리고 강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고사하는 그에게 연구에만 전념하도록 강권하였다. 요즘으로 치면 파격적인 대우를 받는 ‘연구교수’였던 셈이다. 천신만고 끝에 그를 이 대학의 인도철학 담당교수로 초빙하였다.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전통은 한낱 소설에나 등장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차이위안페이는 우위장(吳玉章, 1878~1966), 리스쩡(李石曾, 1882~1973 ) 등과 함께 근공검학운동을 전개하였다. ‘근공검학’이란 가난한 학생의 아르바이트 쯤으로 풀이하면 적절할 것이다. 해외에 파견할 근공검학생은 전국적인 단위로 모집이 이루어졌으며, 유학대상국으로는 프랑스가 적격이었다.

그가 중불교육회장(中佛敎育會長) 시절, 근공검학생의 일원으로서 프랑스로 떠난 16세의 당찬 소년이 덩샤오핑이었으며, 꿈 많은 20세의 청년이 저우언라이였다. 웅지를 품은 ‘젊은 혁명가’들에게 학문적, 문화적, 사상적 경험을 쌓게 했던 것이다.

베이징 대학 웨이밍후(未明湖), 항저우 씨후(西湖), 사오싱 차이위안페이 광장 등지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상하이 교통대학의 캠퍼스에는 위안페이 길(元培路)이 있으며, 그의 발길이 닿는 곳에는 ‘차이위안페이○○학교’ 등 그의 이름을 딴 학교들이 무수히 많다. 우리도 새로 생겨나는 곳에는, 백범 광장, 도산고등학교, 순신대로 등의 이름을 붙여보면 어떨까.

중국의 각 액면가의 지폐에는 예외 없이 마오쩌둥의 얼굴이 새겨져있다. 여전히 그는 ‘인민의 우상’으로 살아있다. 그런 그가 생전에 차이위안페이를 ‘학계태두, 세인(世人)의 귀감으로 흠모하였던 것이다. 턱수염쟁이 장따궈는 오늘도 차이위안페이의 옛집을 지키며, 방문객에게 차이위안페이 예찬에 열을 올리고 있을 것이다.

강성현 peofish58@naver.com
장쑤성 옌청 사범대학 초빙 교수, 『차이위안페이 평전』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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