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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새역모' 교과서 문제점] 下. 소수설 앞세우고 사료 인용 멋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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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 김창석 강원대 역사교육과 교수.고대사

일본 학계 일부에서 한국 고대사를 왜곡해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번 후소샤의 검정신청판 교과서(이하 검정판)는 고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 대한 편파적 주장을 집요하게 확대 재생산해 온 결과물이다. 특정 사실에 대한 해석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검증 안 된 이야기를 비중 있게 소개한다거나 사료를 비판 없이 이용하는 것은 역사 서술의 기본에 위배될뿐더러 중학교 교과서로는 더더욱 적절하지 않다.

대표적 사례를 살펴보면 "대방군(帶方郡)의 중심지가 서울 근처에 있었다"(27쪽)는 주장이 이번에 새롭게 등장했다. 대방군은 후한 말(3세기 초)에 공손씨(公孫氏) 정권이 한반도 남부와 왜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대방군의 중심지는 중국계 고분.유물과 함께 '대방태수'라는 글을 새긴 벽돌이 발견된 황해도 봉산 지역이라는 게 한.일 학계의 통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대방군을 거론하면서 소수 학설을 소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 검정판에서 주목해 봐야 할 것은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낙랑군의 위치다. 권말의 연표를 보면 한국사의 경우 낙랑군을 첫머리에 올려놓았다. 한사군(漢四郡) 이전에 엄존했던 고조선을 전설시대라 하여 부정하는 식민사학의 전통이 아직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은나라부터, 일본은 조몽시대부터 표기하면서 한국사의 출발을 한(漢)이 설치한 낙랑군으로 잡은 것은 한국의 역사가 늦게, 그것도 외부세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시작됐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대방군은 낙랑군이 속한 한사군은 아니지만 낙랑군과 마찬가지로 중국 세력의 통치기구다. 대방군의 중심지가 서울 지역에 있었다면 중국 세력이 한국사의 전개에 끼친 영향력을 보다 확대해 내세울 수 있는 호재임에 틀림없다. 이에 착안해 소수 학설에 불과하지만 전격 채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방군과 한사군이 한반도 중부 이북 지역에 대한 타율성론의 근거라면 남부 지역에서 타율성의 예로 강조한 것이 바로 '임나일본부'설이다. 고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에 출병해 가야(임나) 지역을 지배하고 백제.신라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이번 검정판에는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는 없다. 하지만 야마토 정권이 가야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 군세(軍勢)를 이용해 고구려의 남진을 좌절시켰다는(32~33쪽) 서술은 과거 임나일본부설의 논지 그대로다. 오히려 야마토 조정이 '고구려에 대항하고 한반도 남부의 지배를 인정받으려고' 중국 남조(南朝)에 조공했다(33쪽)는 내용을 추가하고, 광개토왕릉비와 '송서(宋書)' 왜국전의 기록을 자의적으로 인용함으로써(33쪽) 종래의 주장을 강화했다.

검정판은 국제 관계면에서 고대 일본이 한반도 국가들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누차 강조하고 있다. 고대 동아시아의 최고 문명국은 중국인데, 일본은 그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7세기 이래 대등한 외교관계를 지속한 반면 삼국과 통일신라는 중국에 조공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종속됐다고 했다. 검정판이 그대로 통과되면 독자들은 고대 동아시아의 역사상을 거인 중국과 성인 일본, 그리고 그 사이에서 중국에 기대어 간신히 서 있는 왜소한 체구의 한국으로 기억할 것이다. 일본 학계 일부에서 한국 고대사를 왜곡해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번 후소샤의 검정신청판 교과서(이하 검정판)는 고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 대한 편파적 주장을 집요하게 확대 재생산해 온 결과물이다. 특정 사실에 대한 해석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검증 안 된 이야기를 비중 있게 소개한다거나 사료를 비판 없이 이용하는 것은 역사 서술의 기본에 위배될뿐더러 중학교 교과서로는 더더욱 적절하지 않다.

대표적 사례를 살펴보면 "대방군(帶方郡)의 중심지가 서울 근처에 있었다"(27쪽)는 주장이 이번에 새롭게 등장했다. 대방군은 후한 말(3세기 초)에 공손씨(公孫氏) 정권이 한반도 남부와 왜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대방군의 중심지는 중국계 고분.유물과 함께 '대방태수'라는 글을 새긴 벽돌이 발견된 황해도 봉산 지역이라는 게 한.일 학계의 통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대방군을 거론하면서 소수 학설을 소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 검정판에서 주목해 봐야 할 것은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낙랑군의 위치다. 권말의 연표를 보면 한국사의 경우 낙랑군을 첫머리에 올려놓았다. 한사군(漢四郡) 이전에 엄존했던 고조선을 전설시대라 하여 부정하는 식민사학의 전통이 아직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은나라부터, 일본은 조몽시대부터 표기하면서 한국사의 출발을 한(漢)이 설치한 낙랑군으로 잡은 것은 한국의 역사가 늦게, 그것도 외부세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시작됐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대방군은 낙랑군이 속한 한사군은 아니지만 낙랑군과 마찬가지로 중국 세력의 통치기구다. 대방군의 중심지가 서울 지역에 있었다면 중국 세력이 한국사의 전개에 끼친 영향력을 보다 확대해 내세울 수 있는 호재임에 틀림없다. 이에 착안해 소수 학설에 불과하지만 전격 채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방군과 한사군이 한반도 중부 이북 지역에 대한 타율성론의 근거라면 남부 지역에서 타율성의 예로 강조한 것이 바로 '임나일본부'설이다. 고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에 출병해 가야(임나) 지역을 지배하고 백제.신라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이번 검정판에는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는 없다. 하지만 야마토 정권이 가야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 군세(軍勢)를 이용해 고구려의 남진을 좌절시켰다는(32~33쪽) 서술은 과거 임나일본부설의 논지 그대로다. 오히려 야마토 조정이 '고구려에 대항하고 한반도 남부의 지배를 인정받으려고' 중국 남조(南朝)에 조공했다(33쪽)는 내용을 추가하고, 광개토왕릉비와 '송서(宋書)' 왜국전의 기록을 자의적으로 인용함으로써(33쪽) 종래의 주장을 강화했다.

검정판은 국제 관계면에서 고대 일본이 한반도 국가들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누차 강조하고 있다. 고대 동아시아의 최고 문명국은 중국인데, 일본은 그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7세기 이래 대등한 외교관계를 지속한 반면 삼국과 통일신라는 중국에 조공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종속됐다고 했다. 검정판이 그대로 통과되면 독자들은 고대 동아시아의 역사상을 거인 중국과 성인 일본, 그리고 그 사이에서 중국에 기대어 간신히 서 있는 왜소한 체구의 한국으로 기억할 것이다.

김창석 강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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