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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 문화

느림, 기다림의 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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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얼마 전 부산에 일이 있어 KTX를 탔다. 두 시간 반 정도의 짧은 시간 만에 부산에 도착하고 나니 과학의 발달을 실감할 수 있었고, 그 편리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언가 허전함도 짙게 느껴졌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기차여행은 시간적 여유와 정신적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편안하게 쉬거나 신문을 뒤적이다가 식당 칸에 가서 허기를 채우기도 하고,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석양에 감탄하며 맥주 한잔을 넘길 때의 그 짜릿함과 여유는 쉽게 잊지 못할 묘한 매력이었다. 그런데 이 풍요로움을 신속함이 주는 편리성 때문에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쉬움이 들었다.

빠른 것에 익숙한 우리의 끊임없는 보채기는 예술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테크닉이란 꾸준한 노력의 결과로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돼 있거늘,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조금이라도 빨리 그 경지에 이르려고 조급증을 느끼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내 아이가 모차르트 같은 10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천재이기를 바라는 부모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숨쉬기조차 힘겨운 정도의 무리한 연습을 강요하게 되고, 결국 어린 나이의 이 무리한 연습은 아이의 근육이나 관절에 악영향을 미쳐 심하게는 악기를 다시 연주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할 때도 있다. 진정한 예술가가 되고자 한다면 멀고도 험하고 지루한 길을 지치지 않고 쉼없이 나아갈 수 있는 거북이의 우직함을 먼저 배워야 하지 않을까?

외국의 대연주가들이 한국에 연주하러 와서 우리의 10대 초반 어린 음악도들을 보고 세 번 놀란다는 얘기가 있다. 어린 학생이 연주하겠다고 하는 곡목이 그 대가가 어렸을 적엔 스무 살이 넘어서야 겨우 손대기 시작하는 엄청난 곡이라서 처음 놀라고, 다음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운 곡을 너무나 잘 연주해 또 놀라고, 마지막으로 그 곡보다 기교적으로 훨씬 쉬운 기초적인 곡을 시켜봤을 때 너무나 못해 다시 한번 놀란다는 것이다. 조급증이 빚어낸 우리 예술계의 병폐가 아닐 수 없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이던가, 카우보이 쌍권총을 갖고 싶어 밤낮없이 어머니를 조른 적이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편식이 심했던 나에게 앞으로 이것저것 골라 먹지 말고 아무것이나 잘 먹어야 하며, 학교 가기 전에 꼭 한 시간씩 피아노 연습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셨다. 그리고 그 기간은 무려(!) 1년이었다. 쌍권총을 갖기 위해 1년 동안 먹기 싫은 것 다 먹고, 일찍 일어나 눈 비비며 피아노 앞에 앉아 시계만 바라보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그런데 아버지로서의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중학교 다니는 두 딸들이 원하는 것을 사 줄 때, 내거는 조건의 기간이 기껏해야 일주일 정도다. 심지어 어떨 때는 '이 심부름만 하면 사 줄게'라는 조건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을 내걸 때도 있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이러한 나의 행동은 딸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라기보다, 그들에게서 감사하다는 말을 빨리 듣고 싶은 조급증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반성할 때가 많다. 드러내지 않고 결코 서두름이 없으셨던 어머니, 그 오랜 기다림 속의 깊은 사랑에 고개 숙인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바쁜 일상을 살고 있고, 그러한 생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하루에 10분 만이라도, 하던 일을 멈추고 정신적 사치에 빠져 보면 어떨까? 20~30년 전에 우리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가요나 팝송을 커피 한잔과 함께 다시 들어보자. 첫사랑의 달콤함도, 잔인했던 실연의 아픔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그 시절의 향기와 함께 새롭게 그리고 아름답게 다가올 것이다. 그 향취에 젖은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외치지 않을까? "인생은 정말 한 번 살아볼 만한 것이야!"

김용배 예술의전당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