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세 주부, 고교 자퇴 15년 만에 복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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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치병을 앓고 있는 박모(34.여.목포시)씨는 지난 3일 집 근처에 있는 M여고 3년에 복학, 조카 또래의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 박씨가 지난 12일 루푸스 병 치료를 위해 병원에 들어서고 있다. 박씨는 얼굴이 알려지는 게 싫다며 뒷모습 촬영만 허용했다.

1990년 5월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를 자퇴한 지 15년 만이다. 박씨는 당시 집안이 어렵고 공장에 취직되자 담임교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그만뒀었다.

이후 중학교 동창인 남편(34.사업)과 결혼해 안정된 생활을 꾸렸으나 늘 마음 한 구석에 고교를 중퇴한 데 대한 아쉬움이 남았다.

피부미용실 운영 경험을 살려 대학에 가 피부미용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었으나 가족 뒷바라지를 하느라 엄두를 못냈다.

박씨는 2003년 9월 소변이 붉게 나오고 두통이 심해 병원을 찾았다 정밀검사 끝에 루푸스(전신 홍반성 낭창) 진단을 받았다.

루푸스는 항체가 바이러스.세균 이외에 자신의 정상 조직도 공격하는 자가 면역 질환. 피부.관절.신장 등 각 기관과 조직에 만성적인 염증을 일으켜 꾸준한 관리가 필요한 난치병이다.

박씨는 지난 2월에는 한달간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을 정도로 증세가 악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치료가 더 중요하다"며 만류하던 남편을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며 설득해 복학했다.

"몸이 아프다고 주저앉아 버린다면 발전이 없잖아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고 싶어요."

박씨는 교복을 입고 등교해 오후 5시까지 학교에서 지낸다.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유치원생 딸이 늦게까지 학원에 남아 있어야 해 미안하지만, 엄마를 이해할 때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곤 한다.

박씨는 학교 교과과정이 많이 달라져 컴퓨터 그래픽 등은 따라가기 힘들다고 했다.같은 반 학생들이 "부끄러워 마세요" "힘 내세요"라며 학교생활을 많이 도와 준단다.

한 학생은 인터넷 사랑밭 새벽편지에 '늦깎이 고교 이모님'라는 제목으로 박씨의 사연을 소개했다. 이 학생은 "저희들에게 이모님으로 통하는 그 분이 부디 무사히 고교 과정을 마치고 희망 한자락 간직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고 썼다.

박씨의 담임교사는 "책상에 오래 앉아 있기조차 힘든 상황에서도 애써 밝은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며 "어린 학생들에게 용기를 잃지 않고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 줘 교육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씨는 매달 정기검진을 받고 약물치료를 하고 있으며, 인터넷을 통해 환자들 모임 '루이사'(루푸스를 이기는 사람들 협회) 활동도 하고 있다.

대학 공부도 하고 싶다는 박씨는 "훌륭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과다한 관심을 받는 게 부담스럽다"며 이름 공개와 얼굴 촬영을 마다했다.

천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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