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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와 관광적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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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은퇴한 김모(70)씨는 지난해 말 부인과 함께 태국으로 골프 관광을 다녀왔다.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원도, 한도 없이' 골프를 쳤다. 홀 수에 제한 없이 라운드할 수 있었다. 그는 "열 살만 젊었어도 하루 36홀씩 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음식 걱정을 할 필요도, 향수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클럽하우스에 한국 음식 뷔페가 맛깔스럽게 차려져 있고 내장객의 절반 이상이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골프장에 딸린 호텔까지 이용하고 김씨 부부가 지급한 비용은 200만원. 그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내년에도 가야겠다"며 태국 골프 관광을 자랑한다.

#일본 규슈(九州)의 한 골프장. 이 골프장은 지난해 클럽하우스 옆에 골프채 보관 창고를 건설했다. 클럽하우스에 골프채 보관소가 있지만 공간이 부족해 따로 창고를 지은 것이다. 다름 아닌 한국인 골프 관광객을 위한 것이다. 골프채를 들고 공항을 드나들 경우 괜히 명단에 올라 불이익을 당할까봐 아예 골프채를 사서 현지에 보관하는 한국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규슈 3박4일 골프.온천 패키지 여행에 드는 비용은 80만~90만원. 최모(58)씨는 "규슈 골프장에서 고교 동창을 우연히 만날 정도로 한국인이 많다"고 말했다.

봄이 오고 있다. 골프장 잔디에 물이 오르고 있다. 잔디 새싹이 돋고 색깔이 짙어질수록 골프장 사장과 골프장을 갖고 있는 기업체 임원들의 걱정도 커진다. 바로 골프 부킹(예약) 청탁 때문이다. 참여정부 들어 줄었다고 하지만 부킹 청탁은 여전하다. 힘있는 기관에서 전화를 걸어오거나 이런저런 안면, 거래 관계를 내세워 부탁해오면 거절하기 힘들다. 한 골프장 사장은 "청탁에 대비해 주말에는 회사 임원 이름으로 부킹을 몇 개 빼놓는다"며 "회원들에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호소했다.

골프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몇 십만명이니, 몇 백만명이니 하는 골퍼 수를 굳이 들먹일 필요도 없다. 교외로 약간만 벗어나도 '닭장'이라고 불리는 골프 연습장을 흔히 볼 수 있다. 도심에는 실내 골프 연습장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다. 그만큼 수요가 많다는 이야기다. 현재 전국에서 운영 중인 골프장은 퍼블릭 골프장(58개)을 포함해 194개. 골프를 치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골프장이 부족하니 부킹 청탁을 하고 해외로 골프 관광을 떠나는 것이다. 동남아 국가는 날씨가 따뜻하고 비용도 국내보다 훨씬 싸다. 더욱이 골프를 치며 주변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골프백에 가명으로 이름표를 달 이유도 없다. 더구나 요즘은 중국이 새로운 골프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다. 한해 10만명이 넘는 골퍼가 해외로 나가며 이들이 뿌리는 돈이 1조원에 이른다고 개탄만 할 때가 아니다. 경제가 어렵고 힘들게 사는 이웃이 많은데 골프백을 메고 비행기를 타면 어쩌느냐며 도덕성과 애국심만 강조해서도 곤란하다. 값싸고 편하게 골프를 치겠다는 욕구를 누가 어떻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무조건 막으려고만 하지 말고 해외로 나가려는 이들을 국내로 돌리는 방안을 찾자. 그러려면 국내에 골프장을 더 만들어야 한다. 지난해 7월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꺼냈다가 흐지부지된 '230개 골프장 건립 신청 조기 허용 방안'을 다시 검토할 때다. 골프장 건립에 따른 건설경기 활성화와 고용창출 효과 등 경제적 이득과 환경 파괴 및 국토의 '녹색 사막화' 등 문제점을 함께 놓고 제대로 저울질할 필요가 있다. 특히 2008년 베이징(北京) 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上海) 세계박람회를 찾을 외국 관광객을 한국으로 끌어들여 외화를 벌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서둘러야 한다.

김동섭 산업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