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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문학상 김기택 시인 네번째 시집 '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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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기택(48.사진) 시인을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참 시인같지 않다'. 시인에겐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김 시인은 시인하면 으레 떠오르는 인상과 거리가 있다. 시인의 인상이란 걸 꼭 집어 말하긴 힘들지만, 여하튼 그는 시인처럼 생기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오늘 아침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어깨 부대낀 중년의 샐러리맨처럼 생겼다. 무표정한 얼굴이 그렇고,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가르마도 그렇다. 지난해 미당 문학상을 받은, 이 시대 가장 주목받는 시인 중 한명인 김기택은 그렇게 생겼다. 최근 나온 네번째 시집 '소'(문학과지성사)도 꼭 이렇게 생겼다.

경기도 안양 출신인 시인은 지금 서울 미아동에 산다. 그리고 오늘부터 전업 시인이 됐다. 지난달까지 그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패스트푸드 회사의 부장이었다. 샐러리맨처럼 생긴 게 아니라 샐러리맨이었다! 그래서인지 시는 회색 콘크리트 도시에 갇혀 하루하루를 치이며 살아가는 보통 사람의 팍팍한 일상을 주로 다룬다.

"갑자기 앞차가 급정거했다. 박을 뻔했다/…/습관화된 적개심이 욕이 되어 튀어나왔다"('무단 횡단'부문)처럼 운전 중 일어난 일이나, "승객이 드문드문 앉아 있는 버스 안/…/나는 눈으로 탁구공을 따라가듯 부지런히 고개를 움직여 두 청년의 논쟁을 따라갔다"('수화'부문)처럼 버스 승객의 싸움 구경이 시로 돼 나오고, 전철역에 사는 비둘기는 존재감 상실한 도시인을 상징하기도 한다.

"비둘기들은 상계역 전철 교각 위에 살고 있다/콘크리트 교각을 닮아 암회색이다/…/비둘기들은 검은 먼지와 매연을 뒤집어쓰고/언제나 아스팔트를 보호색으로 입고 다녀서/상계역에 비둘기들이 사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상계동 비둘기'부문)

시인은 갑갑한 도시에 갇혀있다. 그러나 결코 말라죽어가지 않는다. 멀찌감치 떨어진 자연을 동경하거나 찬양하지도 않는다. 외려 도시의 삶 속에서 생명력을 찾으려 애쓴다. 꼼짝않고 콘크리트 바닥을 굳게 딛고 서있다. 그래서 고맙다.

"그녀는 서류 뭉치를 나르고 있었다/…/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던 사과들을/사과 속에 핏줄처럼 뻗어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스스로 넘치고 무거워져서 떨어지는 웃음을/…/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지금 디딘 고층빌딩이 땅이라는 것을/뿌리처럼 발바닥이 숨쉬어온 흙이라는 것을/흙을 공기처럼 밀어올린 풀이라는 것을"(미당문학상 수상작 '어떻게 기억해냈을까'부문)

시인은 농처럼 자신을 "5000부 시인"이라고 부른다. 여태 시집 세 권을 냈는데 하나같이 1만 부를 넘기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지금의 출판 상황을 고려할 때, 그는 적지 않은 독자를 거느린 순수시 작가다. 그런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오늘 저녁 퇴근길 지하철에서 반듯한 가르마의 중년 남성이 곁눈질 하나 없이 묵묵히 책만 들여다보고 있거든, 시인 김기택일 수 있다. 시인은 오늘도 서울 복판 어딘가에 있다.

글=손민호<ploveson@joongang.co.kr>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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