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우 기자의 까칠한 무대<36> 더 이상 티 낼 수가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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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호 05면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다음달 11일 대장정을 마친다. 지난해 9월 23일 개막했으니 얼추 1년간의 긴 항해였다. 그간 유령이 헤쳐온 길은 녹록지 않았다. 출발 때부터 미국발 금융위기로 심상치 않던 분위기는 신종 플루라는 암초에 휘청하더니, 올 초 천안함 카운터펀치에 그로기 직전까지 몰렸다. 월드컵까지 겹치며 시장은 꽁꽁 얼어 붙었다. 그래도 ‘유령’의 맷집은 단단했다. 현재 예상되는 최종 매출액은 270여억원, 관객 수는 33만여 명이다. 특정 기간 단일 공연으론 역대 최고 매출액이자 최다 관객이다. 제작사인 설앤컴퍼니는 “앞으로 10년간 깨지기 힘든 기록”이라고 자신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겉모습이다. 안을 들여다보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이번 ‘유령’ 공연의 평균 유료 객석 점유율은 70%를 넘지 못한다. 수익 규모도 미미해 어디 가서 “돈 벌었다”고 자랑할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그간 ‘유령’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5월까진 나름대로 선전했지만 공연 9개월째로 접어들면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폐막 한 달여를 남기고서야 다시 관객이 꽉꽉 들어찼다.

“지난 1년간 여타 뮤지컬들은 대부분 쫄딱 망했다. 수많은 악재를 뚫고 이런 성과를 낸 게 기적”이라고 제작사 측은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명색이 ‘유령’ 아닌가. ‘오페라의 유령’은 1986년 런던에서 초연한 이후 24년째 롱런 중이다. 미국 브로드웨이에서도 88년 시작돼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가고 있다. 100여 년의 뮤지컬 역사상 ‘오페라의 유령’보다 성공한 작품은 없었다. 그 ‘유령’이 한국에서 간신히 손해가 나지 않았다고? 이건 자존심이 상한다고 쉬쉬할 일이 아니다. 심각한 일이다. ‘오페라의 유령’마저 대박이 나지 않는다면 과연 한국 뮤지컬 시장에 희망이 있을까.

‘유령’은 2001년 국내에서 초연됐다. 128억원의 제작비는 당시로선 입이 쩍 벌어질 큰돈이었다. 그러나 ‘유령’은 198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한국 뮤지컬 산업화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때도 2002 한·일 월드컵이란 초대형 사건이 있었다. 2010년 ‘유령’의 흥행 결과를 외부 변수 탓으로만 돌리기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다시 2001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그때만 해도 뮤지컬이란 장르는 생소했다. 특히 ‘오페라의 유령’은 묘했다. 작품은 분명 뮤지컬이건만 ‘오페라’란 제목 덕인지 클래시컬하다는 인상이 강했다. 공연장은 강남 테헤란 부근에 새로 둥지를 튼 LG아트센터였다. 모든 관람 조건이, 뮤지컬임에도, 고급 문화의 아우라를 물씬 풍겼다. 자신의 문화적 취향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티 내고 싶어하는 대한민국 상위 1% 계급이 앞다투어 지갑을 열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말을 빌리면 ‘구별짓기(Distinction)’가 2001년 ‘유령’에 투영됐다고 난 생각한다.

그렇게 뮤지컬은 ‘명품’으로 한국 사회에 처음 수용됐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지금도 뮤지컬이 명품일까? 아닐 게다. 그새 뮤지컬은 너무 흔해졌다. 누가 뮤지컬 보러 간다고 “와우! 대단한데” 하랴. 그런데 티켓 값은 여전히 10만원이 넘는다. 중산층에겐 부담스러운 값이다. 그렇게 뮤지컬은 상류층과 중산층 모두에게 환영 받지 못하는,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전락했다. ‘유령’의 부진은 가장 극명한 예다. 한국 뮤지컬은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


중앙일보 문화부 공연 담당 기자. '성역은 없다'는 모토를 갖고 공연 현장 구석구석을 헤집고 있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더 뮤지컬 어워즈’의 프로듀서를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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