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公約 집착하다 국정 그르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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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선거가 끝난 지금, 이제 노무현(盧武鉉) 당선자는 내년 2월 말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면 한달 만에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3월 말 이전에 세계무역기구(WTO) 농업위원회가 세계 각국의 의견을 모아 마련할 농업개방 방식을 한국이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서다. 구체적으로는 농산물에 대한 관세를 어떻게 낮춰가며, 보조금은 어떻게 줄여나갈지에 대해서다.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결정할 문제다.

지난 11월 13일. 盧 당시 대통령후보는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우리 쌀 지키기 전국 농민대회'에 참석, 열변을 토했다.

"2004년 쌀시장 개방 재협상에서 관세화 유예를 반드시 관철하겠습니다."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결과에 따라 2004년에 열리게 돼 있는 WTO의 쌀 수입개방 협상에서 관세화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농가부채 경감을 위해 금리를 인하하고 농업신용보증제도를 개편해 연대보증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같은 약속으로도 부족했던지 盧후보는 이날 군중 속에서 날아온 계란 세례를 받아야 했다.

盧후보는 이날 이후 쌀시장 관세화 유예와 관련해서는 몹시 조심스러워졌다. 이회창·노무현·권영길 세후보 TV합동 토론에서는 "최대한 (관세화 유예) 노력은 하되 개방해야 한다고 보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여러발 물러섰다.

이미 농림부 관계자들조차 "쌀 관세화를 피하기는 어렵다"고 전망하고 있다. 한 당국자는 "관세화 가능성도 염두에 둔 쪽으로 말을 바꾼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면서 "그러나 농가부채 경감을 위한 금리 인하는 농어촌 구조조정과는 반대되는 정책"이라고 아쉬워했다.

盧당선자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은 여러모로 노태우(盧泰愚)전 대통령의 공약사업인 경부고속철 사업을 떠올리게 한다.

盧전대통령은 87년 민정당 대선 후보 시절 경부고속철 건설을 공약했다. 그는 취임 이듬해인 89년 기술조사 용역을 발주한 지 1년도 채 안돼 기본계획을 확정하고, 임기 마지막 해인 92년 서둘러 경부고속철을 착공했다. 막상 공사는 시작했지만 사업 기간이나 공사비 예측도 제대로 안됐고 차종 선정도 안된 상태였다. 특히 총사업비는 91년 5조8천억원에서 93년 10조7천억원, 97년 17조6천억원, 현재는 18조원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행정수도 이전도 경부고속철 이상으로 그 영향을 다각적으로 신중히 따져본 뒤에 손을 대야지, 공약이라고 무조건 밀어붙일 일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지적들에도 이제 찬찬히 귀를 기울여보고 맞는지 틀리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10년 안에 마무리는 어렵다."(권용우 성신여대 교수)

"이전 비용은 단순한 택지개발이나 건축비용 외에 그에 따른 기업·직장·가정 이동 등 총체적 사회비용까지 감안해야 한다."(최막중 한양대 교수)

"盧전대통령도 행정수도 이전 검토를 지시한 적이 있다. 그러나 결국 물·교통·비용 문제 등 때문에 이뤄지지 않았다. 우선 충청권엔 물이 부족하다. 또 서울과 새로운 행정수도 간의 교통량이 늘어나면 경부축(京釜軸)이 심하게 혼잡해질 수 있다. 행정수도 이전에 들어갈 비용을 지방경제에 투자할 경우 어떤 것이 더 효과적인지도 따져봐야 한다."(이석채 전 정통부장관·지역균형발전기획단장)

盧당선자가 밝힌 '7% 성장, 일자리 50만개 창출'공약에 대해서는 당장 내년 살림을 꾸려야 할 각 부처가 걱정을 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고위 관계자는 "김영삼 대통령 때 경기 부양책이었던 '신경제 1백일 계획'의 악몽이 생각난다"고 말한다.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은 5∼5.5%다. 그걸 7%로 올리려면 돈을 확 풀든지 재정지출을 늘리는 방법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우리 경제가 만들어낼 수 있는 일자리는 매년 30만개 정도다. 50만개 일자리를 만들려면 연 9∼10% 성장을 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가뜩이나 공적자금 상환으로 인한 재정부담과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한데 경제를 망칠 각오를 하기 전에는 추가로 돈 풀 형편이 아님은 분명하다.

재경부 장관을 지낸 민주당 강봉균 의원은 "내일 일도 모르는데 5년을 예측한 계획에 얽매이면 실천도 안되고 무리수를 두게 된다"며 공약에서 제시한 숫자들은 과감하게 떨쳐내야 한다고 말했다.

'군 복무 기간 4개월 단축' 공약도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군 복무 단축 공약이 나올 때는 후보간 공방이 치열한 때였다. 한나라당 공약(2개월 단축)보다 더 강한 내용을 넣은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한 군사 전문가는 "2개월을 단축할 경우 매년 약 2만2천명의 병력이 추가로 필요하고 교육비 등을 포함, 4천억원 가량의 돈이 더 들어간다. 4개월을 단축할 경우 경비가 더 드는 것은 물론이고 숙련병이 줄어 전력(戰力)에도 적지 않은 차질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盧당선자는 행정수도 이전에 덧붙여 청와대와 국회도 이전하겠다고 했다. 국회 이전은 입법부가 결정할 문제지, 대통령이라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회 사무처 관계자는 아직 공식 논의가 없음을 전제로 "논의가 된다면 국회 차원의 합의가 있어야 할 것이고, 행정부와 예산편성 논의도 해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盧당선자는 각종 법의 제정·개정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현재 국회가 여소야대(與小野大)인 상황에서 대통령 공약 사업이라고 해도 야당 의원들이 쉽게 법을 만들거나 고치는 데 동의할지 의문이다. 입법 여부는 국회의 몫이다. 대통령은 국회를 설득할 수 있을 뿐이다.

김수길 부국장, 이하경·김종혁·송상훈 정치부 차장, 이세정·고현곤 경제부 차장, 이영종 통일외교팀 기자

sg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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