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57) 빨치산에 총구를 겨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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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격장을 만들어 병사들에게 사격술을 연마시켰고, 소부대 단위로 적을 맞아 작전을 벌이는 전술을 익히도록 했다. 늘 관계가 소원했고, 때에 따라서는 심각한 충돌까지 벌였던 경찰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 그리고 그를 토대로 경찰에서 다량의 빨치산 정보를 입수했다. 인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5사단 장병이 주민들에게 폐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조치도 취했다. 때로는 현지 경찰의 지도부와 함께 지리산 주변 마을을 순행하면서 주민들의 불편함을 들으며 이를 고치려고 노력도 했다.

1949년 9월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왼쪽)의 연설을 듣고 있는 미군 정보장교 짐 하우스만 소령(맨 오른쪽 얼굴 보이는 사람)의 모습이다. 하우스만은 이승만 대통령부터 노태우 대통령까지 역대 한국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인물이다. 한국과 미국의 중요 현안들을 막후에서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중앙포토]

나를 흔히 ‘중국인’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사람이 많다. 좋은 의미에서다. 가타부타 남의 의견에 선뜻 동조하지 않으며, 좋거나 싫거나 표정에서 일단 변화를 보이지 않아서다. 나와 가장 가까운 지인(知人)들 일부는 장난스럽게 나를 표현할 때 ‘중국X’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 내 스타일이다. 광주 5사단장으로 부임하면서 나는 그런 작업으로 시간을 보냈다. 지리산에 빽빽이 들어선 그 수많은 나무가 잎사귀들을 떨어뜨리기 시작할 때까지 나는 그렇게 준비를 하면서 기다렸다. 아마 이 점도 내 스타일이 중국적인 것과 닮았다고 사람들이 판단하는 한 이유일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이후 노태우 대통령까지 40여 년 동안 한국의 최고 권력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활동한 사람이 앞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는 짐 하우스만이다. 그는 정보통이었다. 이승만 대통령과도 늘 수많은 일을 논의한 뒤 미국에 이를 보고하면서 한·미 양국의 현안을 막후에서 조율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계의 요인과 군의 요직에 있던 한국의 수많은 인사를 관찰한 인물이다. 정보통답게 한국의 요인들을 속속들이 파악하는 게 그의 중요한 업무였다. 그가 나의 5사단장 시절을 회고한 대목이 있다. 그는 여수와 순천에서 14연대가 반란 사건을 일으키자 광주에 나와 함께 내려와 작전을 같이 구상하면서 실천에 옮겼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정보국장으로 있을 때에도 내 사무실에 자주 들러 같이 업무를 논의했던 사이여서 나를 잘 알았다.

새로 5사단에 부임한 나를 바라보는 미 군사고문단의 시각은 답답했던 모양이다. 여수와 순천의 14연대 반란 사건 뒤 지리산 지구에 빨치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이를 토벌하려는 군대의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다. 전임자들은 빨리 대응하는 스타일이었던 모양이었다.

부대 지휘관이 현지에 부임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보고가 올라왔던 것이다. 그러나 미 군사고문단은 신임 5사단장인 내게서 별다른 보고가 올라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다. 하우스만 당시 대위는 나중의 회고담에서 이렇게 그때의 상황을 적고 있다.

“백선엽은 여순 사건에서 돌아와 군 숙군 작업을 마무리 짓고 다시 5사단장을 맡아 지리산 공비 토벌에 들어갔던 것인데, (전임자인) 김백일과는 달리 작전명령이 떨어졌는데도 꽤 오랫동안 묵묵부답인 채로 있었다. (군사고문단장인) 로버트 장군은 ‘백은 어떻게 된 거냐’고 내게 채근했다. 나는 여순 사건 때에도 백의 작전 스타일을 잘 아는 터였다….”

그는 로버트 군사고문단장에게 “백 지휘관은 작전이 성공할 수 있다고 믿기까지는 부대를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부대를 훈련시키고, 주민의 도움을 청하고 그러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보고했다고 한다. 그는 또 “백선엽은 실제로 받은 작전명령을 그대로 수행하기보다는 장병을 훈련시키고 동네 할아버지들을 찾아다니며 국군의 입장을 설명해 협조를 구한 뒤 결국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했다”고 자신이 관찰한 내용을 적었다.

굼뜨기 짝이 없었던 내 스타일을 하우스만 대위가 잘 이해해줬던 게 다행이었다. 그는 그런 사정을 로버트 군사고문단장에게 설명했고, 결국 ‘제때 보고조차 올리지 못하는 일선 지휘관’쯤으로 나를 파악했던 로버트 장군의 오해를 풀어줬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때를 기다렸고, 내게 주어진 시간을 보내면서 원칙적인 면을 따지고 보강했다. 군사들을 훈련시켰으며, 경찰과의 화해를 통해 적을 파악했다. 두려워 경계심만을 품었던 주민들과의 사이를 좁혀 그 속에 빨치산들이 들어가 숨을 공간을 좁혔다.

지리산에 낙엽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이제 움직일 때가 된 것이다. 내가 이끄는 5사단은 49년 11월에 접어들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지리산을 비롯한 인근의 산속에 숨어든 빨치산들을 향해 우리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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