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처녀치마·호랑버들… 들꽃에 달린 갖가지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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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살아 숨 쉬는
식물교과서
오병훈 글·사진
마음의숲, 381쪽
2만3000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꽃 한 송이의 사랑과 나무 한 그루의 이별 이야기. 인간 세상의 변두리에서 말 없이 피고 지는 식물에도 우주의 섭리가 죄다 들어있다는 가르침이었다. 이 책은 그런 자연의 속삭임을 가만가만 기록했다. 식물학자인 저자가 전국 23개 지역의 산과 들에서 우리 꽃과 우리 나무의 이야기를 채집했다.

거듭 말하지만, 이건 이야기다. 단순한 도감록이나 그림책이 아니다. 책은 한반도의 봄·여름·가을·겨울 식물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이를테면 이 땅의 봄은 바람꽃과 함께 온다. 이른 봄,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면류관을 닮은 꽃이 피는데, 그게 바람꽃이다. 바람꽃의 학명은 아네모네. 봄의 여신 글로리스의 남편인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사랑한 여인이 아네모네였다. 질투에 눈이 먼 글로리스가 아네모네를 꽃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훗날 바람꽃이란 이름이 붙었다. 꽃말은 ‘속절 없는 사랑’. 봄 산을 화사하게 수놓는 바람꽃에 이토록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담겼을 줄이야.

깊은 겨울에도 푸른 잎사귀를 터뜨리는 관목인 겨우살이는 또 어떤가. 겨우살이는 다른 나무에 접 붙어서 잎사귀는 물론 열매를 내는 나무다. 이 나무는 그 호사스런 습성만큼이나 로맨틱한 풍습을 지녔다. 유럽에선 겨우살이 아래서 입을 맞추면 상대방이 자신을 싫어해도 밀쳐내지 않는다고 한다. 겨울 들녘에서 흘겨 봤던 겨우살이 나무가 품고 있는 로맨틱 스토리다.

이 책은 우리 둘레의 들꽃이나 나무에 담긴 소소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꽃말이나 풍습 외에도 민속학·자원학·의학적 가치에 이르기까지 꽤 세밀하게 자연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꽃과 나무가 자라는 지역의 전설이나 역사와도 연결시켜 넉넉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매발톱꽃·처녀치마·호랑버들 등 우리 고유의 꽃이름을 익히는 재미도 쏠쏠하다. 페이지마다 고해상도의 식물 사진도 덧붙어 있어 두고두고 활용할 만한 실용서이기도 하다.

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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