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미국이 가까운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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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너희 한국은 대체 무얼 믿고 미국에 대드느냐. " 스스럼없이 지내는 일본인 친구가 느닷없이 던진 질문이다.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을 연구하는 그는 평소 일본 외교가 줏대없이 미국에 휘둘리는 데 대해 불만을 토하곤 했었다. 그의 질문은 그래서 엉뚱했다.

사실 워싱턴 근무시절 사귀었던 일본인 친구들이나 도쿄 체류시절 만났던 일본 지식인들 가운데는 미·일 관계를 비정상적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았다. 막무가내 미국의 행태를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고 비굴하게 미국에 끌려가는 일본 외교를 못마땅히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현실감있는 이해는 다를 바 없었다. 거대한 미국의 힘 앞에서 일본은 납작 엎드릴 때 엎드릴 줄 알았다. 그리고 제 목소리 낼 기회가 오면 워싱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조심스레 파고드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일본인들의 눈에 한국의 대미 외교가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비쳤을까 짐작이 간다. 미·일·중·러 네 마리의 '고래'에 둘러싸인 한국이란 '새우'의 위상을 따져보면 주변을 상대로 곡예를 펼치기엔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누가 뭐래도 아직까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국가운영의 원칙에 있어 가장 가까운 상대는 미국이다. 그래서 더더욱 미국에 거침없이 대드는 한국의 무모함이 일본인들에겐 신비에 가깝다.

세계 제2의 시장경제를 이룬 일본이지만 아직도 미국으로부터 존경스런 상대로 대접받지는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워 한다. 하지만 한국은 미국의 존경은커녕 신뢰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일본인들의 생각이다. 한국의 대미 외교 행태나 미국을 대하는 한국민들의 자세를 일본이 쉽게 이해 못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들의 궁금증에 대한 해답 한토막을 월 스트리트 저널의 발행인 캐런 하우스가 한국을 다녀가며 남긴 최근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요즘 한국의 분위기는 "북한의 김정일(金正日)위원장보다 오히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을 더욱 우려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보수 논객의 인상이라곤 하지만 무언가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 숨겨둔 비밀이 탄로난 듯 당혹스럽다. 반세기 넘게 지켜온 한·미 동맹관계를 보는 우리 시각의 굴절(屈折)이 그토록 심하다. 주한미군에 안보를 의지하면서도 북한을 몰아세우는 야멸찬 미국에는 고개를 내젓는 것이 우리의 이중적인 대미관(對美觀)이다. 또 걸핏하면 세계 몇 위(位)를 앞세워 우리 처지에 대한 착각을 자극하는 캠페인 탓에 이성보다 감정이나 정서에 탐닉하게 돼버린 현실도 부인하기 어렵다.

일본 지식인들은 불공평한 미·일 관계를 애써 바로잡으려 노력하면서도 동맹관계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꿔온 소중한 외교 자산(資産)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반면 우리 주변에는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해 동족을 위협하면서 미국 앞에선 목을 빳빳하게 세우는 북한의 '자존(自尊)외교'에 은근히 자긍심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북핵 위협에 국제사회가 경악한 와중에도 "통일되면 북한 핵무기는 우리의 것"이라든가, 미국·일본보다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우리 정서에 자리잡는 현상을 역사 왜곡이나 미국의 오만에 따른 결과로만 해석하려 든다면 이는 우리의 어설픈 자화상을 외면하는 것이다.

미국 언론인의 지적처럼 우리에겐 어려운 선택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대통령 되겠다는 그 누구의 입에서도 선택의 지침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래도 미국이 가깝다"는 지침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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