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佛 격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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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역사적으로 갈등을 빚어 온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연합(EU)의 농업보조금 제도를 둘러싸고 또다시 격돌했다.

2004년 동유럽 등 10개국의 EU 가입을 앞두고 농업보조금 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는 영국과 이 제도의 최대 수혜국인 프랑스의 대립은 최근 양국 정상들의 말싸움으로까지 번졌다. 급기야 프랑스는 지난달 29일 오는 12월 초로 예정된 양국 정상회담을 연기한다고 발표해 두 나라의 관계가 순탄치 않음을 시사했다.

EU의 농업보조금은 2000년 기준 EU 예산의 45%인 4백15억유로(약 50조원)에 달하며 이중 24%를 프랑스가 가져간다.

이 제도를 그대로 둔 채 농업 비중이 높은 폴란드 등을 신규 회원국으로 받아들일 경우 영국 등 기존 회원국의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설전 벌인 블레어와 시라크=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브뤼셀에서 열린 EU 정상회담에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에게 다가가 "당신 정말 무례하군. 내 평생 이런 식으로 모욕당한 적이 없소"라며 언성을 높였다. 시라크 대통령의 직설적인 공격에 블레어 총리는 충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설전은 블레어 총리가 EU의 농업보조금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할 것을 요구하며 불거졌다. 블레어 총리는 EU 정상회담 직전에 당초 자기 편으로 생각했던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가 시라크 대통령과 농업보조금에 대해 대폭적인 삭감없이 '2007년부터 상한선을 설정한다'고 느슨하게 합의해 뒤통수를 맞은 꼴이 됐다.

블레어 총리의 반발에 시라크 대통령은 "영국의 EU 분담금 환급 특혜를 폐지해야 한다"고 맞받아쳤다. 영국의 분담금 환급 특혜는 1984년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가 "EU에 내는 돈에 비해 받는 것이 거의 없는 만큼 이를 바로잡지 않을 경우 EU 회원국 확대에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위협해 이뤄졌다.

영국은 지난해 44억유로(약 5조3천억원)의 환급 혜택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프랑스는 약 15억유로(약 1조8천억원)를 추가 부담했다.

◇역사적 앙숙, 영국과 프랑스=도버 해협을 사이에 둔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1337∼1453년)·워털루전투(1815년) 등 숱한 전쟁을 치렀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유럽의 패권을 놓고 사사건건 갈등을 빚어 왔다.

프랑스는 60년대에 영국이 EU의 전신인 유럽공동체(EC)에 가입하는 것을 막았다.

샤를 드골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영국의 전통적인 친미(親美) 성향과 시장친화적 정책이 프랑스의 이해와 맞설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 영국은 73년 EC에 가입한 후 유럽을 미국과 맞먹는 강력한 지역공동체로 키우려는 프랑스의 노력에 줄곧 찬물을 끼얹어 왔다.

정재홍 기자

hong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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