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48) 혐의자 처벌 대신 전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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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총참모장에게 “전체적인 조사는 일단 끝을 맺게 됐습니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을 상대해서 조사를 하다 보니 억울한 사람도 적지 않을 듯합니다”고 말을 꺼냈다.

나는 이어 “순간적인 생각이나 감정에 치우쳐 좌익에 뛰어든 군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을 군법재판에 회부하면 실형을 받아 옥살이를 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총참모장님께서 저와 함께 이들을 일일이 면담을 해서 억울한 경우가 있으면 구제해 주는 게 좋다고 봅니다.”

이 총참모장은 동의했다. 나는 “저와 함께 혐의자들이 수감된 영등포 창고중대에 가셔서 면담을 해주시기 바랍니다”고 말했다. 이 총참모장은 “그렇게 하자”고 말했다.

1952년 10월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오른쪽에서 둘째)이 기자회견 뒤 김창룡(맨 오른쪽) 등 정보국 요원들과 찍은 사진이다. 김은 철저한 업무 태도로 활약하며 나중에는 특무대장으로 반공 일선을 지휘한다.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왼쪽에서 둘째)의 모습도 보인다. [백선엽 장군 제공]

당시 영등포 창고중대 감방에는 어림잡아 3000여 명의 혐의자가 있었다. 철저한 반공(反共)주의자였던 김창룡 당시 1연대 정보주임을 비롯해 경찰에서 군으로 입문한 조사요원들의 활약에 힘입어 조금이라도 좌익 연루 혐의가 있는 사람들이 대거 잡혀 들어와 있던 것이다.

특히 김창룡 정보주임은 철저한 검거 작업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길을 지나치다가 술집에서 북한의 인민군 노래가 들리면 당장 뛰어들어가 자리에 있던 사람 모두를 연행하는 식으로 좌익 색출 작업에 임했다.

그를 정보국 요원으로 데리고 있었던 김점곤 예비역 소장의 기억에 따르면 김창룡은 별종의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김점곤 장군은 어느 날 저녁 퇴근 무렵에 “요즘 시내에 남로당이 뿌리는 삐라 와 벽보가 서울 시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니 이를 수집해 보고를 해보라”고 지시했다. 다른 부하들 모두 이를 건성으로 흘려들었다고 했다. 오직 한 사람, 김창룡만은 그 지시를 철저히 이행했다.

말이 나왔기에 덧붙이지만, 김창룡은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인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몇 사람만을 빼놓고서는 상대방이 좌익에 어느 정도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인지, 의심을 좀체 거두지 않는 시선으로 사람을 대했다. 나중에 그가 반공의 선봉으로 특무대장에 올랐을 때도 그의 그런 철저한 태도 때문에 적지 않은 그의 상관들이 전전긍긍했다. 좌익 연루 혐의뿐 아니라 사생활에서의 여러 문제점도 그는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성격의 김창룡이 주도하는 좌익 연루 혐의자 색출은 상당히 강도가 높게 이뤄졌던 게 사실이다. 좌익 연루자가 강압적인 조사를 회피하기 위해 엉뚱한 사람의 이름을 거명해서 붙잡힌 이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정밀한 조사 작업 없이 대량으로 사람들을 붙들어 왔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조정하는 힘도 필요했다. 1차 조사 작업이 모두 끝나서 분류 작업이 끝난 상태였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이응준 총참모장이 나서서 억울한 경우를 당한 사람들로부터 의견을 들어보는 게 중요했던 것이다.

나는 약 10일 동안 이응준 총참모장과 함께 매일 영등포 창고중대로 출퇴근을 했다. 보통 오전 9시에 작업을 시작하면 오후 6시 정도에 일과가 끝났다. 창고중대의 본부 건물 사무실에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이응준 총참모장과 내가 앉고, 맞은편에는 혐의자 한 사람씩을 불러다가 그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사람이 워낙 많았고, 불려온 사람들마다 사연도 제각각이었다. 빠르게 진행되지는 못했지만 억울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들 본인의 입을 통한 이야기를 듣는 게 중요했다.

마침내 이응준 총참모장과 내가 배석한 마지막 진술 청취 작업이 모두 끝이 났다. 날씨가 추워 난방이 잘 되지 않는 커다란 창고중대 건물에서 추위에 떨면서도 이 총참모장은 끝까지 그 작업을 완수했다. 나는 이 총참모장에게 “중요한 혐의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 모두는 군법재판에 넘길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총참모장은 “그 점은 정보국장이 알아서 판단하라”고 승낙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49년 7월에 숙군 작업은 모두 끝을 맺었다. 그 결과에 따라 모두 4749명이 처벌을 받았다. 적극적인 좌익 활동자와 폭력 및 파괴 행위에 가담한 사람은 군법회의에 회부돼 엄벌을 받았다. 좌익 경력은 있었으나 적극적으로 그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은 정상을 참작해 가벼운 처벌에 그쳤다.

사형을 받고 사라진 사람도 있었고, 실형을 받은 뒤 복역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90% 정도는 모두 훈방키로 했다. 불명예제대를 시켜 군문(軍門)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대신에 실형을 살게 하지는 않기로 한 것이다.

처벌받은 사람은 당시 군 병력의 5%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그들 중에는 억울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짧은 시간 내에 이렇게 좌익 혐의자를 색출해 방출함으로써 1년 뒤 벌어진 6·25 전쟁에서 대한민국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 작업을 완수하지 못했다면 개전 초기에 국군은 좌익 혐의자들의 준동으로 제대로 전쟁을 치를 수 없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 숙군으로 큰 고비를 넘었던 것이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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