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조사가 國監 대체할 수 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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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국회의 국정감사권은 해마다 정기국회가 시작된 뒤 20일간 국정 전반을 감사하는 국정통제권이다. 국회의원이 신뢰를 받고 국회가 정상적인 기능을 하자면 국정감사권은 헌법상 규정된 것이지만 폐지돼야 한다고 본다. 국회의 행정부에 대한 감시·통제는 1년에 20일을 정해 놓고 한탕주의식으로 할 게 아니라 일년 내내 국회상임위원회에서 상시적으로 할 일이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 헌법에도 이런 국정감사권은 없다. 도대체 그 짧은 기간에 어떻게 국정 전반을 감사한단 말인가. 무리고 어불성설이다.

국정감사제는 제헌헌법 제정 당시 선진국의 국정조사권을 잘못 도입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매년 국정감사와 그 준비로 약 2개월간 국정 마비와도 같은 상태를 초래하며 국력을 낭비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국정감사는 제도적으로 여야 정쟁의 장(場)만을 마련해 주고 있다. 또 감사를 당하는 기관은 로비 열풍에 휩싸이게 된다. 국회의원이 각종 이권에 개입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고 정치를 무질서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의 비정상적인 특권의식은 아마도 국정감사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국정감사제도의 폐지를 정치 개혁의 핵심으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게 그 때문이다.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은 임기 동안 행정부를 운영한 뒤 차기 선거에서 이에 대한 국민의 심판을 받는 게 원리다. 또 행정부는 감사원의 감사를 받으면서 법 테두리 내에서 정책 선택권을 갖는다. 이에 대한 국회의 감시·비판은 각 상임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상시적으로 하는 것이지 기간을 정해 놓고 비리를 들춰내듯 할 일이 아니다. 미국 상·하 양원의 상임위 활동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국정감사 때 부각되는 문제의 대부분은 여러 차례 반복되는 여야의 정치적 공방에 불과하다. 병무청이나 서울지검에 대한 이번 감사에서는 이들의 행정 운영보다는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이 되풀이됐다. 정치 공방 위주의 국정감사가 의원 스스로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정치불신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국회의 비판 기능은 본회의 대정부 질문, 예산결산위원회의 정책질의, 상임위원회를 통한 구체적 감시 등으로 충분하다. 법적 문제가 있다면 독일식으로 그 발동 요건을 완화, 국정조사권을 발동해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

즉 국정조사계획서의 본회의 불승인 절차를 헌법에 위반하는 때로 국한해 그 이유를 명시하게 함으로써 국정조사가 국회의원 재적 4분의1의 찬성만으로 이뤄질 수 있게 해야 한다.

국정감사의 즉각적인 폐지는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헌법 개정 사항으로 전 국민의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헌헌법 이후 계속돼온 제도를 폐지하는 것에 국민이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또 국정조사권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국민은 국정감사가 국회의 거의 유일한 국정통제 수단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국회의원들 스스로 합의해 국정감사를 자제하고 국정조사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국정조사가 국정감사를 대체할 수 있다고 국민에게 인식시키는 게 매우 중요하다. 국회의 각 상임위원회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국정 전반을 통제해야 한다.

국정감사의 폐지는 국회의원들에게는 스스로의 특권을 포기하는 결과가 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 이는 불가피한 선택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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