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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촌의 반가운 파격

중앙선데이

입력

“홍승엽이라고들 하던데….”
3주 전쯤이었다. 무용계 한 인사로부터 새로 출범하는 국립현대무용단의 초대 예술감독으로 홍승엽(48)씨가 유력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 내 반응은 “아∼ 그래요?”였지만 속내는 ‘에이, 설마’였다. 안 될 거란 생각이 왜 먼저 들었을까.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이란 쉽게 말해 ‘국립현대무용단 단장’이다. 문화체육관광부에 속한, 엄연한 기관장이다. 기사 딸린 차를 타면서 폼을 잡아야 하고, 때론 국회에 가서 굽실거릴 줄도 알아야 하는 자리다. 그런데 안무가 홍승엽이 그런 기관장이 된다고? 언뜻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도 유인촌 문화부 장관은 7월 28일 홍씨에게 진짜로 임명장을 주었다.

홍씨는 ‘댄스 시어터 온’이란 무용단을 이끌어 왔다. 그가 안무한 작품은 세계 최고 수준의 유럽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도 있었다. 특히 ‘달 보는 개’ ‘데자뷔’ ‘빨간 부처’로 이어지는, 2000년 전후의 작품들은 한국 현대 무용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수작들이었다. 물론 과거에 비해 그의 최근작들은 신선감이 떨어지는 면이 있긴 하다. 하지만 한국에서 무용한다는 이들 상당수가 대학 교수 자리 하나 턱 꿰찬 채 제자들 데리고 왕 노릇하면서 도통 알 수 없는 엉망인 작품을 내놓는 것과 비교하면, 홍씨는 한참 위다.

이력도 흥미롭다. 홍씨는 원래 공대생이었다. 경희대 섬유공학과를 다녔다. 근데 워낙 끼가 많았던 모양이다. 대학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춤을 추었고, 시작한 지 2년 만에 동아무용콩쿠르 대상을 거머쥐었다. 현대 무용만으론 성에 안 찼는지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해 발레 테크닉을 익히기도 했다. 93년 국내 최초의 민간 무용단을 만들어 지금까지 유지했다는 건, 척박한 한국 무용계로선 기적 같은 일이다.

춤 잘 추고, 안무 잘 한 거보다 홍씨를 더 유명하게 만든 사건은 따로 있었다. 2004년 그는 ‘올해의 예술상’ 수상을 거부했다. “심사위원 대부분이 공연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비디오 심사’만으로 우열을 가리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고 대들었다. 상을 준다는데 받지 않겠다는 것도, 무용계 최고 권력 그룹인 평론가를 향해 직격탄을 날린 것도 당시로선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이토록 반골 기질 농후한 이가 기관장이 되니 의아할 수밖에.

문화예술 단체장이란 자리가, 아닌 이들도 있지만, 실력보단 권력 주변 인사들에게 많이 돌아가는 걸 우린 숱하게 봐왔다. 그건 예술인 출신 유인촌 장관이라고 해도 확 나아보이진 않았다. 이념적 색깔이 다른 이들을 많이 내보냈고, 유 장관의 모교인 중앙대 인맥이나 개인적으로 “형, 동생”하며 막역하게 지내는 인사들을 적지 않게 발탁하곤 했다. 낙하산인 게 뻔히 짐작되는, 전라도에 출마했던 한나라당 소속 정치인을 산하 기관장으로 뽑기도 했다. 이런 상식과 어긋나게, 그저 작품만 만들어온, 실력은 있지만 조금 외곬수적인 성향이 있는 홍씨가 기관장이 됐으니, 이번 임명을 가리켜 “유 장관 재임 중 가장 참신한 인사”라는 말이 나오는 거다.

역대 최장수 문화부 장관인 탓에 이번 개각에서 유 장관이 교체 대상이라는 얘기가 적지 않다. 설사 바뀐다 해도 임기가 끝나는 날까지 이런 예상 밖 인사가 또 있길 기대해 본다. 의표를 찌르는 극적인 반전은 예술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니 말이다.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중앙일보 문화부 공연 담당 기자. ‘성역은 없다’는 모토를 갖고 공연 현장 구석구석을 헤집고 있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더 뮤지컬 어워즈’의 프로듀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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