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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오십 넘으면 ‘건처사재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77호 14면

골프를 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거다. 라운드를 하는 4시간여 동안 동반하는 이들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말하기보다는 주로 듣는 편이다. 남들처럼 이야기를 재미있게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대놓고 이렇게 말한다.

정제원의 캘리포니아 골프 <122>

“칼럼까지 쓰던데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주시죠.”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다. 글 쓰는 사람이 재미있는 이야기도 잘할 것이란 근거 없는 믿음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얼마 전 고교 동문인 S선배와 라운드를 했다. 그도 예외 없이 내게 이렇게 물었다.
“요즘 재미있는 일 좀 없나.”
재미있는 일이 뭐 있을까. 더구나 재미있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그걸 재미있게 말할 자신이 없는데 말이다. S선배는 실없이 웃는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놈, 참 재미있는 놈이네.”

그런데 재밌는 건 S선배였다. 2년 전 동반 라운드할 때 그는 분명히 오른손잡이였는데 그날은 왼손으로 샷을 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른손으로 골프 쳤잖아요.”
S선배는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원래는 왼손잡이였거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왼손으로 골프 치기가 쉽지 않아서 그동안 울며 겨자먹기로 오른손으로 골프를 쳤던 거지. 그런데 얼마 전 거리 좀 늘려보겠다고 운동을 하다 오른팔 근육이 끊어졌어. 그래서 그 이후론 왼손으로 골프를 치고 있지. 왼손으로 골프 친 지 이제 1년이 다 돼가는데 아직도 어색하군.”
오른손으로 80대 초반 스코어를 기록했던 그는 왼손으로도 골프를 곧잘 쳤다. S선배는 왼손으로 빈 스윙을 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이제 우리 나이에는 말이야, 특히 건강에 신경 써야 한다고. 너 그런 말 들어 봤냐. 나이 오십 넘으면 ‘건처사재우’라고.”
“건처 뭐라고요.”

“건처사재우. 남자 나이 쉰이 넘으면 첫째는 건강, 둘째는 처, 셋째는 회사(직장), 넷째는 재산,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친구가 중요하다 그 말씀이다. 건강이 무너져봐. 부귀영화가 다 무슨 소용이냐. 건강한데 마누라가 없어도 문제고, 직장이 없어도 힘들겠지. 재산과 친구는 말 안 해도 알 것이고.”
“아, 그렇군요.”
“그런데 여자는 좀 다르다. 여자는 ‘건처사재우’가 아니고 ‘건딸재우취’란다.”
“그건 뭔가요.”

“건강이 최우선인 건 남녀가 다 똑같고. 여자는 나이 오십이 넘으면 딸이 필요하단다. 남자는 마누라가 필요한데 여자는 남편보다 속을 툭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딸이 우선이라나. 그 다음에 재산, 그리고 친구와 취미가 꼭 필요하다는 거지. 적당한 취미가 없으면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다는 거야.”

“제법 그럴듯하네요.”

“응, 확실히 맞는 말인 것 같아. 나만 봐도 그래. 오른쪽 근육이 끊어져서 지금은 왼쪽으로 골프 치잖아. 그런데 이것만으로도 다행이지. 건강을 잃으면 다 소용없는 거라고.”

S선배는 그날 왼손으로 골프를 치면서도 버디 1개를 곁들여 88타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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