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 구 상] "요즘은 한강 보며 洗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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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명리(名利)를 밝히지 않으며 평생 살려했더니 참 남사스런 일입니다. 독자분들에게 애독·애송된다기보다 시쳇말로 '뭐 별로'요 오직 80여 평생을 쓴다는 그 하나로 원로시인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게 제 실상입니다. 마음으로는 문학관 이름에서 '구상'을 빼고 제 고향이나 다름없는 '칠곡'을 원했으나 그 바람 역시 위선적 허세일까 자제했습니다. 이 문학관이 '구상'의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참된 문학·문화의 이름으로 사용되길 기도드립니다."

10월은 문화의 계절이요,축제의 나날이다. 이 좋은 상달을 맞아 전국 곳곳에서는 향토 축제가 열리고 사람 사는 정을 즐겁게 나눈다. 10월 4일 오후 2시 경북 칠곡군은 왜관읍에 구상문학관을 짓고 개관 기념식을 갖는다.6·25 전쟁 후 20여년간 이곳 낙동강변에 머물며 '강''그리스도의 폴'등의 연작시를 집필하고 교수와 신문사 주필 등을 역임하며 영남의 문화를 가꿨던 구씨에 대한 향토의 보답이다.이 문학관은 22억여원을 칠곡군에서 들여 연건평 1천6백여㎡에 2층으로 세워졌다.

또 경남 진주에서는 개천예술제가 3일 개막돼 10일까지 열린다. 논개의 충절이 깃든인 남강의 촉석루와 함께 민족의식과 예술혼을 일찍 깨친 진주의 문화예술인들이 1949년 닻을 올린 개천예술제는 올해로 52회를 맞는 명실상부한 민족 최대의 예술제다. 이 진주예술제 출범과 초창기 참여예술인들의 면목을 보면 설창수·오상순·김달진·유치환·조지훈·김춘수·이원섭·이경순·이해랑 등의 문인과 음악가 윤이상,화가 박생광 등 우리의 예술사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다. 1회 때부터 참여,그 때의 예술가들은 거의 다 가고 이제 홀로 남은 구씨를 개천예술제에서는 최고 어른으로 모시려하나 건강이 여의치 않다.

98년 당한 교통사고와 노령으로 거동이 불편해 개천예술제도,자신의 문학관 개관기념식에도 구씨는 참석하지 못한다. 생전이나 사후나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관을 극구 거부하다 건강 이유로 개관식에 참석못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구상(具常·83)씨를 여의도 아파트로 찾았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예부터 멋과 한이 있었습니다.단군시대로부터 삼국시대까지 풍류도라는 이름으로 내려왔던 그 멋과 한이 지금은 변질됐습니다. 멋은 흥취나 세련미를 뜻하고 한은 원한이나 억울 등으로 이해되는데 그게 아닙니다. 멋은 초연함이고 한은 체관인 것입니다. 이런 멋과 한을 너와 네가 함께 나누는게 문화고 축제입니다."

그러면서 구씨는 조선 기생 시인 황진이의 시조 한 수를 힘에,기억에 부친 듯 띄엄띄엄 들려줬다.'동짓달 기나긴 밤을/한 허리 둘러 내어//춘풍 이불 아래/서리서리 너엇다가//어른님 오시는 밤이어드란/구비구비 펴리라.'겨울 밤은 길기만 하고 님이 오지않아 분통이 터지는데도 한풀이가 아니라 초탈한 마음으로 싸안는 태도, 이것이 멋과 한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문화와 축제도 뽐내며 즐기기만 할 것이 아니라 심미적 감성을 기초로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게 널리 베풀고 건진다'는 구원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며/걸레처럼 더럽고 추레한 내 마음을/그 물에 헹구고 빨아보지만/절고 찌들은 땟국은 빠지지 않는다.//흐려진 내 눈으로 보아도 내 마음은/아직도 명리에 연연할 뿐만 아니라/음란의 불씨도 어느 구석에 남아 있고/늙음과 병약과 무사(無事)를 핑계로 삼아/태만과 안일과 허위에 차 있다."

교통사고로 병상에 눕기 전 발표한 시 '근황'일부분이다.구씨의 아파트 현관에는 '관수재(觀水齋)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거실에는 '관수세심(觀水洗心)'이라는 서예가 걸려 있다. 전쟁과 독재의 50,60년대 낙동강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닦았듯 이후에는 한강을 바라보며 마음을 깨끗이 씻고 있는 것이다.

46년 원산에서 동인시집 '응향'을 통해 문단에 나온 구씨는 그 시가 '반인민적'으로 규정돼 쫓기다 47년 월남해 서울 중앙통신사 취재부장으로 일하다 폐병이 재발돼 치료차 공기 좋다는 마산으로 요양갔다. 그곳서 진주의 설창수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해당화 피는 원산에서 공산당들에게 시를 쓴 죄로 박해받고 월남탈출해 사고무친한 자유남한에서 해당화같은 피를 쏟으며 고독하게 쓰러진 시인 구상을 구출하자"는 취지문을 진주 지도층과 문화인에게 돌려 입원 가료비를 모금해줬던 것. 이 때부터 구씨는 영남을 제 2의 고향으로 삼고 살아왔다.

그런 인연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알음알이가 있어 어떻게든 좋은 자리를 주려했으나 구씨는 한사코 거절한 것으로 주위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구씨는 그러한 사실 자체마저도 '위선적 허세'일까 영 밝히길 꺼려하고 있다. 사회나 문화예술계·문단의 이런 저런 곳에서 영예로운 자리에 앉히려 한 것도 이내 사양해 소위 '불행한 역사나 독재·부패 정권이 존경할 만한 사회 원로를 망친 나라'에서 보기 드문 원로로 남아 있다.

"사람들이 영원을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눈앞의 이해타산에 사로잡히지 말고 진실을 찾고 실천하는 모습 말입니다.이것이 문화예술의 본 모습이요,사람이 나아가야할 방향이고 종교 아니겠습니까.요즘은 지도층이든 일반이든 문화예술이든 너무 표피적이고 형이하학적이에요."

지금까지 시집 10여권을 비롯,수필집 등 30여권의 저서를 펴낸 구씨는 '오늘 속의 영원,영원 속의 오늘을 추구한 시인'으로 평가된다.가톨릭 집안에서 모태신앙을 갖고 태어난 구씨는 신학을 전공하고 신부가 되려다 시인이 됐다. 그래서 그의 시는 명쾌하게 마음을 맑게 닦아 신에 다가가려는 숙연함을 지닌다.

사회가 뜬 구름같고,너도나도 고쳐보자 소리쳐 미래가 더욱 불안하고 우리의 마음을 지탱할 문화·예술마저 발랄하게 감각화돼가는 시절 원로로서의 그런 숙연함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bacch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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