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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닉스 자존심 회복" 벽보 눈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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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지난 13일 오후 경기도 이천의 하이닉스반도체 공장 복지관 앞.

이 공장 근로자들이 트럭 적재함을 무대 삼아 흥겨운 노래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회사 측에서 마련해 금요일마다 열리는 거리가요제다.

박동진 총무 팀장은 "직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이런 행사를 마련했다"며 "가족들까지 고려해 지난 여름에는 3년 동안이나 문닫아 두었던 수영장을 다시 개장했고, 다음달엔 어린이 사생대회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이닉스반도체(당시 현대전자)의 유동성 위기가 표면화된 2000년 9월 이후 만 2년이 됐다.

하이닉스 근로자들은 이날 "회사가 갑자기 어려워지면서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지만 이제는 상황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자존심 회복 별러=이천공장의 주력 메모리공장인 6공장 앞에는 '자존심 회복'이라는 구호가 눈길을 끈다.

공장 사무실에 들어서면 '현장에서 제안하는 생산성 기네스 운동' 상패가 20여개 전시돼 있다. 지난해 6월부터 벌인 이 운동은 신기록을 갱신한 근로자에게 상패를 준다.

공장 근로자인 정향채(28)씨는 "기네스 운동은 하이닉스의 생산현장 직원들이 벌이는 자존심 회복 운동"이라고 말했다.

길근섭 공장장도 "두달 전 초미세회로 공정으로 전환했을 때는 웨이퍼 생산량이 월 3만2천장이었지만 기네스 운동 덕에 지금은 3만8천7백장으로 향상됐다"며 "근로자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비용절감 방안과 생산성 향상을 위한 개선점을 찾아내 매달 두세번은 신기록이 깨진다"고 설명했다.

또 노조 관계자는 "여성 근로자의 근속 연수가 평균 3년이었으나 최근 들어 4~5년으로 느는 등 이직수가 줄어 회사가 어려울수록 결속력이 더 강해졌다"고 말했다.

하이닉스의 기술 인력은 중국·말레이시아 등 신흥 반도체 국가의 표적이 되고 있다. 회사 측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실제로 좋은 조건에 이직하려는 인력도 생기고 있다. 그러나 이 숫자는 1% 미만이라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엔지니어인 이경철(33)대리는 "추가 투자없이 모든 라인의 회로 선폭을 0.18미크론에서 0.15미크론으로 줄였고, 지금은 0.13미크론에 도전하고 있다"며 "돈이 없어 시작한 운동이지만 한계기술에 도전해 이를 실현하는 기쁨을 맛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생활고에 시달리기도=임금이 5년째 동결 상태다. 또 대부분의 근로자는 우리 사주를 사느라 얻은 은행빚 때문에 아직도 고전하고 있다.

또 이천공장은 하이닉스에서 분사해 나간 25개 기업과 한 울타리에서 생활하는데 다른 공장은 대부분 흑자를 내고 있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

일부 기업은 하이닉스의 눈치를 보느라 올 추석 선물을 준비해 놓고 아예 택배를 통해 집으로 보내주고 있다.

하이닉스의 한 근로자는 "분사한 회사로 간 옛 동료들이 추석 보너스나 선물같은 얘기를 쉬쉬하는 걸 보면 씁쓸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직원들은 최근 구조조정 컨설팅업체인 도이체방크가 보고서에서 '우선 회생시킨 후 매각 검토'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일부 보도에 희망을 걸고 있다.

정상영 노조위원장은 곧 채권단과 회사가 내놓을 구조조정안에 근로자들도 따를 것이냐는 질문에 "이사회가 외부 압력에 의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천=양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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