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두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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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김수철(34·서울 서대문구)씨는 요즘 초등학교 동문들에게 전화하느라 바쁘다. 고향의 면장배(面長盃)체육대회에 나갈 축구선수들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전교생이 1백명에 불과한 산골 학교 출신이라 연락되는 남자 동문은 죄다 모아야 겨우 축구팀을 꾸릴 수 있다. 그의 고향은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은 전남 구례군 간전면. 간전면은 수년 전부터 추석 즈음에 체육대회를 열어왔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동문들이 '면장컵'의 영예를 거머쥐기 위해 바쁜 일상사 제쳐두고 고향을 찾는다. 사실 이름이 그럴 듯해서 '면장컵'이지, 면장 이름이 새겨긴 수건이랑 냄비·화장지가 상품의 전부다.

고향은 이미 잔치 분위기다. 동네 들머리엔 대형 플래카드가 붙었고 동네마다 체육대회 때 쓰일 먹거리 등 준비에 바쁘다. 체육대회 뒤에는 노래방에서 가족 노래자랑이 준비돼 있다.

"올해도 돼지를 잡는대요. 동네 사람들 다 모여서 한바탕 뛰어놀고 즐겁게 보내는 게 명절 아닙니까." 스무살 때 고향을 떠났던 유호원(57·서울 양천구)씨. 그는 최근 인터넷 동문회 사이트를 통해 모교인 초등학교에서 추석 때 운동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1969년 충북 단양군 가평초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그는 친구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학교 '땡땡이' 치고 같이 멱감으러 다녔던 양코(박양수씨), 찔찔이(박상열씨)랑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눈물이 팽 돕디다. 양코는 벌써 머리가 허옇게 셌다고 하네."

전국에서 '추석 운동회'가 열린다. 코흘리개 꼬마들의 운동회가 아니라 배 나오고 머리 벗겨진 어른들의 운동회다. 어렵사리 고향을 찾았으니 친척들과 함께 명절을 쇠는 것 이상으로 옛 친구들과 부대끼며 밀린 회포를 푸는데 무게를 싣는 풍속도가 생긴 것이다.

최근 수해를 입은 강원도 강릉의 옥천초등학교 출신 김상훈(28)씨는 이번 추석에 동문들과 함께 고향 마을의 수해 복구에 나선다. 해마다 동문들이 고향에서 운동회를 해왔지만 올해는 쓰레기 치우고 무너진 제방 쌓으며 추석을 보내기로 했다.

인터넷 동문회 사이트 '아이러브스쿨'(iloveschool.com)에 따르면 추석을 앞두고 사이트 조회수가 평소보다 1.5~2배 늘었다. 수십년 전 해지는 줄 모르고 뛰어놀던 그 운동장에서 그 때 그 친구들이랑 다시 한번 뛰놀고 싶은 어른들 때문이다. 올 추석 고향에선 살갑고도 눈물겨운 운동회가, 어린이를 닮은 어른들의 운동회가 열린다.

서울이 고향이어서 추석이라고 해도 마땅히 갈 곳이 없는 김동석(30·서울 마포구)씨는 9월 달력만 보면 심사가 묘해진다.

TV에선 이번 추석에도 어김없이 '성룡' 영화만 연신 틀어댈 테고, 시내 극장도 하루종일 매진이 뻔하고, 어지간한 술집도 죄다 문을 닫을 것이기 때문이다. 방안에서만 뒹굴자니 '청춘'이 억울하고 그렇다고 할 일도, 갈 곳도 마땅찮다. 해서 짜낸 묘안이 도심 드라이브다. 서울시내 차량의 절반이 빠져나간다는 연휴 동안만이라도 신나게 도심을 달려보자고 생각했다. 요즘 그는 인터넷 등을 통해 도심 드라이브 코스를 잡고 있다.

김은일(32·서울 송파구)씨는 3일 연휴 동안 날마다 미팅을 한다.지난 설 때 집안 어른들한테 "대를 끊을 생각이냐"며 시달렸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차라리 연휴 동안 이성을 만나고 그 핑계로 고향에는 내려가지 않을 생각이다.

이은영(34·여·서울 성북구)씨도 사정은 마찬가지.'결혼 언제 하냐'는 친척들의 성화를 생각만해도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는 추석 하루전인 연휴 첫날 쌍꺼풀 수술 예약을 했다. 추석 때 친척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여름휴가 때 고향 광주도 갔다 왔다."시집가려면 어쩔 수 없지않으냐"는 이씨의 고집에 고향 어른들도 수긍을 했다.

결혼정보회사 닥스클럽 조사에 따르면 미혼 남녀들은 '웃어른의 결혼 성화'가 '추석하면 떠오르는 첫번째 이미지'라고 답했다."추석 연휴 동안 미팅 기회를 잡아달라"는 회원들의 문의가 평소의 2배를 넘는다고 한다.

시댁이 경기도 과천인 주부 김순미(37·서울 영등포구)씨 가족은 명절마다 놀이공원에 간다. 추석 당일 새벽에 차례를 지내고 오전 9시쯤 개장시간에 맞춰 놀이공원에 가면 평소 30~40분 걸려야 간신히 탈 수 있었던 놀이기구들을 마음껏 탈 수 있다. 김씨는 "요즘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아졌다"며 "그래도 일년 중 어느 때보다 가장 편하게 놀이공원을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텅빈 서울. 한가위날 서울 도심에선 자동차가 질주한다. 이곳 저곳서 청춘남녀들의 만남이 이어지고 송편을 싸온 가족들이 놀이공원에 모인다. 한가위는 역시 한가위다.

손민호 기자

한가위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올 추석은 휴일이 짧아 최악의 귀성 대란이 예상된다지만 그래도 한가위만 다가오면 우리들은 가슴 한켠이 넉넉해지고 달뜬 마음에 잠을 뒤척인다. 농경 시대 한가위는 한해의 농사를 마무리하는 하나의 제의(祭儀)였다. 하지만 이제 한가위 풍경은 사뭇 다르다. 추석빔 차려 입고 한나절 걸려 고향 찾아가는 것도 변함 없고 송편 빚고 차례 올리는 일도 여전하지만 지금의 한가위는 예전과 분명 다른 구석이 있다. 2002년 한가위 풍경 두가지를 미리 찾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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