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불뿜는 공룡에 '육탄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할리우드 영화 '레인 오브 파이어'(원제 Reign of Fire)는 스펙터클한 액션 영화다. 노파심에서 한마디 거들면 제목의 '레인'은 '비(Rain)'가 아니다. 지배·통치 등을 뜻하는 영어 단어 'Reign'을 소리나는 대로 옮기다 보니 제목부터 혼란스럽다.

직역하자면 '불의 지배'를 뜻하는 원제처럼 영화의 주요 소재는 불이다. 핵폭탄에 버금가는 엄청난 위력을 가진 불이 화면 전체를 가로지른다. 그렇다면 화재 영화? 대답은 '노'다.

미스터리 TV 시리즈 'X파일'로 명성을 쌓았던 롭 바우먼 감독은 중생대에 서식했던 익룡을 불러들였다. 가공할 폭발력을 지닌 네이팜탄처럼 사방을 불태우는 화염을 내뿜는 익룡, 그리고 그 괴물들과 맞서는 전사들의 격투를 그리고 있다. 바우먼 감독은 시대적 배경을 2084년으로 잡았다. 암울하고 칙칙한 묵시록적 분위기를 첨가했다. 인류의 무지가 빚어낸 핵전쟁, 정체 불명의 외계인 습격 대신 수억년 전에 살았던 공룡을 미래 사회에 부활시켜 인간과 대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레인 오브 파이어'의 묵시론엔 종교적, 혹은 존재론적 고민이 전혀 녹아있지 않다. 작품의 분위기만 그럴 듯하게 끌어가는 소품에 불과하다. 공간만 80여년 후의 사회일 뿐, 현재의 모순이 곪아터지는 미래가 결코 아닌 것이다.

익룡의 대습격을 받아 잿더미로 변한 런던 시내의 황량한 풍경, 대재앙을 겨우 모면한 사람들이 숨어 사는 을씨년스런 성채 등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이 펼쳐지지만 그건 단지 SF 영화의 모양새를 갖추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레인 오브 파이어'의 익룡은 '조스'의 상어,'아나콘다'의 구렁이, '에일리언'의 외계 괴물, 그리고 현재 상영 중인 '프릭스'의 식인 거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에게 극도의 공포를 일으키는 '물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액션 영화답게 전투 장면은 볼 만하다. 1년에 수백만마리의 암컷을 번식시키는 익룡 수컷에 맞서는 소수의 생존자들이 주인공이다. 어릴 적 익룡의 공격으로 어머니를 잃은 퀸(크리스천 베일), 익룡을 퇴치하려고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밴젠(매튜 메커너히)이 '투톱'을 이루고, 여기에 헬리콥터를 조종하는 강인한 여전사 알렉스(이자벨라 스코룹코)가 가담해 난공불락의 괴물을 퇴치한다.

동원된 무기는 탱크와 장갑차, 소총과 석궁 등. 핵폭탄의 공습에도 꿈쩍 없이 살아남았던 익룡들이 재래식 무기 앞에서 쓰러진다는 상상력에 선뜻 공감할 순 없지만, 반대로 온몸을 던져 싸우는 배우들의 육탄 연기는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특히 날아가는 익룡에게 그물을 씌우기 위해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리는 자살 특공대 장면, 불을 뿜고 달려오는 괴물을 향해 도끼를 들고 뛰어내리는 밴젠의 모습 등이 인상적이다. 여름 더위를 잊게 하는 '청량영화'로선 늦게 찾아온 감이 있지만, 그래도 불구경 한번 실컷 해보고 싶다면 말릴 길이 없겠다. 13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박정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