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北 대중예술 교류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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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귀순 배우 김혜영이 다음 달 청년 의사와 결혼한다는 소식이다. 4년 전 이 맘 때였다. 통일부를 출입하는 MBC의 김현경 기자가 어느 날 예능국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동행이 있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상당한 미인이었다. 무슨 일일까 궁금했는데 전혀 예기치 않은 부탁을 했다. 북한에서 귀순한 여배우인데 가능성이 있는지 봐 달라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느닷없고 황당한 제의였다. 우선 여배우가 귀순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고향이 함경북도 청진이라고 했다. 내 부모님도 그 근처(북청)가 고향이어서 일단 친근감이 들었다. 진짜 북한에서 연기를 했느냐고 물었더니 주인공도 했다면서 몇 편의 영화 제목을 댔으나 확인할 길은 없었다. 김기자에게 일단 발음만 고치면 주인공감으로도 무난하다는 평가를 해주었다. 며칠 후 신문마다 그녀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 후 그녀의 성장과정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특이한 이력 때문인지 처음에는 여기저기 토크쇼에 불려나갔다. 건강한 치아 덕에 치약광고 모델로도 뽑혔다. 드라마 (SBS '덕이')에도 진출했다. 악극무대에도 섰다. 그녀가 고정으로 오래 출연한 프로그램은 바로 KBS2 '개그 콘서트'였다. 거기서 다른 두 명의 여성 코미디언과 함께 '꽃봉오리 예술단'을 연기했다. 나 역시 코미디 프로그램을 연출한 적이 있지만 그녀의 열연에 결코 편안하게 웃을 수는 없었다.

북한방송을 흉내내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시각이 있다. 북한의 대중예술에 친근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진정성을 희화화해 되레 더 거리감이 생기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걱정했던 부분은 당연히 후자 쪽이었다.

1999년 가을과 겨울, 나는 두 차례 평양을 방문했다. 민족통일음악회의 남쪽 연출자 자격이었다. 거리마다 입간판들이 즐비했는데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는 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북쪽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같이 가는 길이 쉽지 않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다.

정치색은 배제하자고 해놓고 정작 무대에 올린 하이라이트는 노골적인 체제 찬양이었다. 약속 위반이라고 항의했더니 담당자가 "이게 어떻게 정치적입네까. 이건 모름지기 인간적 예술입네다"라고 해서 나를 맥빠지게 했다.

공연 뒤 북쪽 관객들의 평이 궁금했다. "노래하면서 왜 그렇게 악을 씁네까. 알아들을 수가 없지 않습네까." 호소력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렇다. 북한의 아나운서는 우리가 보기에 매우 전투적이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 아나운서를 보면 너무 간드러진다고 하지 않겠는가.

결론은? 오래 떨어져 있음으로써 생긴 차이를 인정하자. 그러나 그 차이를 차별적 시선으로 겨누지는 말자.

북쪽의 민족화해협의회 간부는 미인의 세 가지 조건으로 용모가 참하고, 총명해야 하고, 신뢰감이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결혼 후에도 계속 연예의 길을 가서 기필코 정상에 서겠다는 북한 '미인' 김혜영에게 이런 덕담을 결혼선물로 주고 싶다.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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