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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한국의 토속신: 한민족 의식세계 꿰뚫는 신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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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빠진 한국인, 과연 우리 토속신은 얼마나 알까. 아마 산신, 도깨비 정도를 넘어가면 궁색해질 것이다. 우리의 신화가 빈약해서가 아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이야기들을 한 줄로 꿰어 엮는 작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건국설화만 봐도 서양의 신화 못지 않게 극적이다. 해모수가 하백의 딸 유화와 정을 통해 낳은 알에서 나온 인물이 바로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이라고 한다. 정상적인 관계에서 잉태된 것도 아니고 또 알이었다니 탄생부터 파란만장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서관이 최근 개발에 들어간 '오방대제와 한국신들의 원형'은 늦게나마 우리 민족의 의식세계에 내재해 있을 상상력을 자극하고 민족 자긍심을 찾아보자는 노력으로 평가할 만하다. 문헌으로, 이야기로 전해오는 토속 신들을 모두 모아 그 신들의 영역과 그들이 지녔던 물건들을 되돌려주고 서열과 계보를 파악하는 작업이다.

기획자인 함성호씨는 "우리 민족은 유교·불교 등 외래 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다 보니 우리의 것에 천착할 기회가 없었다"며 "기초 작업을 거친 결과 서양 신들의 서열이 역할에 의해 매겨지는 것과 달리 우리 신들은 장소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예컨대 그리스 신화에서 최고신으로 꼽히는 제우스 신은 은혜로운 비를 내리게 하는 천공(天空)을 신격화한 것이다.

제우스는 하늘을 지배하는 동시에 세계를 통치하는 자였다. 신들과 인간의 아버지인 셈이다. 반면 우리의 최고신인 칠성신은 인간의 목숨을 관장하는 것으로 통하는데 바로 북두칠성을 가리킨다. 조선 숙종 때 완성된 '천상열차 분야지도'가 북두칠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서 힌트를 얻어 칠성신을 최고신으로 잡았다.

칠성신은 그 하위신인 동서남북 네 방위를 지배하는 동방청제·서방백제·남방적제·북방흑제와 함께 오방대제로 불린다. 그리고 상위신이라 하더라도 하위신에게 지시를 내리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칠성신이 동방청제 등에게, 가신(家神)이 변소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신들끼리의 관계는 풍속이나 음양오행, 풍수, 민속학 등을 응용하여 개발팀들이 엮어내게 된다. 가설이 개입되는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하고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가 반영돼야 하는데 예산과 시간이 걸림돌로 작용할 것 같다.

당연히 오방대제들은 집을 관장하는 신과 관계를 맺는다. 서방백제의 경우 부엌을 관장하는 조왕신과는 상충한다. 북방흑제는 이 조왕신과는 대단히 친하나 변소신과는 반목한다. 전통적으로 부엌은 서쪽에 있으면 해가 질 때 햇빛을 지나치게 많이 받아 음식이 쉬 상하기 때문에 대부분 북쪽에 위치하고, 변소는 많은 미생물이 번식하는 곳이므로 부엌과는 멀찍이 떼 놓는 관습에 따른 것이다.

기획팀들은 풍수지리학에서 나오는 청룡·백호·주작·현무와 동방청제·서방백제 등이 일치하는데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거북과 뱀으로 그려지는 현무를 북방흑제의 탈것으로 해석한다.

하부신까지 총 1백여 신이 각각 원고 1백장 정도로 정리된다. 아울러 신들의 형상과 각 신들이 지닌 물건, 복색, 비행체 등이 시각자료로 제시된다. 일반인에게는 약 1년 후 선보인다. 개발작업이 끝나면 이 콘텐츠는 게임과 만화에 가장 먼저 응용될 듯하다. 예컨대 이현세의 만화 『천국의 신화』 같은 작품을 구상할 때 한국신의 계보를 활용하면 재미와 교육적인 효과를 동시에 노릴 수 있다.

개발에 참여한 이영유(시인)씨는 "정신분석학에서 오이디푸스 신화를 차용하여 아버지를 대하는 아들의 심리를 설명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신화가 문화 전반으로 파급되면 우리의 정신세계가 보다 풍성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02-710-7777.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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