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만에 비료생산 중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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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아듀-한국비료'. 국내 요소비료의 대명사였던 옛 한국비료(현 삼성정밀화학)가 울산 비료공장을 정리하고 정밀화학 업체로 변신 중이다. 이 회사는 지난달 연간 33만톤을 생산하는 울산 비료공장 2개 라인중 1개라인 가동을 중지했다.

나머지 라인도 요소비료 생산은 중단하고 사우디·미국 등에서 요소비료를 수입해와 포장, 판매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사실상 비료 생산사업에서 철수한 셈이다. 다만 비료사업부는 판매를 위해 계속 두기로 했고 공업용 요소는 일반화학 부문에서 계속 생산한다.

이 회사 관계자는 "중동 지역에서 가격이 싼 천연가스를 주원료로 요소비료를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가격 경쟁에서 버틸 수 없어 공장 가동을 중지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이 공장에서는 원유에서 뽑아낸 나프타로 요소비료를 만들어왔다. 국내 물량의 30% 정도를 공급했다. 나머지 70%는 농협의 자회사인 남해화학이 맡았다.

삼성정밀화학의 올해 매출액은 7천3백억원, 당기순이익은 7백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올 상반기 매출액은 2천9백36억원, 경상이익은 3백21억원을 기록했다.

이 중 비료사업은 전체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에 불과하다.

한국비료는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李秉喆) 회장이 1964년 민영회사로는 처음으로 비료사업에 뛰어들면서 울산에 1백만평의 부지를 매입, 당시로는 최대 규모의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67년 준공을 앞둔 시점에서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면서 반강제적으로 국가에 헌납했다. 당시 한국비료는 첫해 매출액이 삼성그룹 전체 매출액의 30%에 이를 정도로 비중이 크고 알짜인 기업으로 통했다.

삼성그룹은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다가 94년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조치 때 한국비료를 되찾았다. 소유주인 산업은행은 입찰 예정가를 1천3백억원 정도로 잡았으나 삼성이 써낸 가격은 2천3백억원이나 됐다.

당시 주가가 한주에 10만원도 안되는 기업을 인수하기 위해 주당 33만원을 써내 재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이다. '선대 회장의 회사를 되찾아야 한다'는 꿈을 27년 만에 이룬 순간이었다.

이때 회사명도 삼성정밀화학으로 바꾸고 사업도 다각화했다. 비료뿐 아니라 ▶시멘트가 서서히 굳게 하는 기능성 첨가제인 메셀로스 등 각종 첨가제▶세계 1위 제품으로 인조가죽 원료인 DMF▶의약용 코팅 및 캡슐 원료 등으로 다각화한 것이다.

앞으로는 전자재료 분야가 강한 듀폰과 의약·농약 등 고가의 다품종 소량생산에 강점이 있는 바스프를 벤치마킹해 정밀화학 분야로 사업구조를 고도화할 계획이다.

국내 비료산업은 60년대 초 정부가 기간산업으로 지정하면서 국영회사로 출발했다.

70년대 들어서는 정부가 '비료 생산을 늘려 수출하겠다'며 투자를 늘리기 시작해 남해화학·충주비료·나주비료 등이 생겨났다.

그러다 수출이 부진을 거듭하면서 과잉투자 문제가 발생하자 정부는 80년대 초 비료산업 합리화 조치를 단행했다. 공장을 지은 지 10년도 안된 충주·나주비료 등이 새한미디어·LG그룹에 각각 인수돼 공장이 폐쇄됐다.

당시 공기업이던 한국비료는 비료 매출의 비중이 90%였지만 삼성그룹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사업다각화에 성공해 매각 대상에서 제외됐다.

농민들이 한 부대라도 더 구하기 위해 농성까지 했다는 한국비료. 94년 회사 이름이 바뀐 데 이어 이제는 비료생산을 그만둬 역사의 한페이지를 접게 됐다.

김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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