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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심성 사면 남발 말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정부가 거리 질서를 헝클어뜨린 운전자들에게 대대적인 '사면(赦免)' 조치를 내렸다. 지난 6월 30일을 기준으로 한 특별 감면 조치의 혜택 대상은 무려 4백81만여명이다. 도로교통법 위반(음주운전·과속 등)으로 걸린 운전자들은 벌점이 삭제되거나 면허증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됐다. 잠시의 실수로 실생활에서 큰 불편을 겪었던 국민에겐 기분 좋은 소식이다. 그렇지만 그 특혜는 발상의 무리함, 인기 위주의 국정운영, 질서의식의 해이, 사면권 남발, 법의 존엄성 저해 등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 조치의 배경으로 정부가 댄 것은 월드컵이다. 국민적 질서의식을 화합과 국운 융성의 계기로 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월드컵 성공=교통법규 위반자 크게 봐주기=국운 융성'이라는 인식은 엉성하고 꿰맞춘 듯하다.'대~한민국'의 거리 응원이 전세계에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자발적인 시민의식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가 질서를 잘 지켰다고 교통사범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시민정신의 자발성, 월드컵 참여 정신을 모독하는 일이다. 높은 자리에 앉아 국민의 행동에 점수를 매겨 왕조시대식 은전(恩典)을 베풀려는 듯한 자세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더욱 치명적인 문제점은 '법은 지키는 사람만 손해'라는 불신 풍조를 키운다는 데 있다. 그동안 "헌법 위에 떼법이 있다"는 비아냥을 들어왔던 김대중(DJ)정부가 법 집행의 형평성과 안정성을 스스로 해치고 있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심어주고 있다. DJ정권 들어 교통사범 사면은 이번이 두번째다. 여기에다 정치적 사건에 대한 여러번의 사면조치 탓에 사면권 남발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시기적으로도 미니 총선이라는 8·8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있어 전형적인 선심 행정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이번 특혜로 인해 DJ정권 내 정책판단의 우선 기준이 법의 안정성, 정책의 일관성이 아닌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이라는 여론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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