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발'오언 : 절묘한 모션… 페널티킥 이끌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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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전반 43분 오른쪽에서 길게 넘어온 볼을 잡은 잉글랜드 마이클 오언이 페널티 라인을 넘어섰다.슬금슬금 드리블하는 모습이 꼭 페널티킥을 얻어내려는 의도가 있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성급한 아르헨티나 포체티노가 다리를 걸었고, 콜리나 주심이 자동차 헤드라이트 같은 눈빛을 번뜩이며 휘슬을 불었다. 페널티킥이었다.

주장 데이비드 베컴이 볼을 앞에 놓고 섰다. 축구화에 그의 아들 브루클린의 이름이 새겨진 오른발이 크게 움직였다.볼은 골키퍼 파블로 카바예로의 왼쪽을 통과해 골그물 깊숙이 박혔다.

4년 전 '10마리 용감한 사자와 한 얼간이'라는 욕을 뒤집어 썼던 그. 디에고 시메오네를 걷어차 퇴장당하는 바람에 아르헨티나에 8강 티켓을 내주고 뉴욕 브루클린으로 도망치듯 떠나야 했던 그가 빚을 갚는 순간이었다.

경기 전 양팀 응원단은 양국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에도 쉴새없이 상대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원한과 앙갚음으로 점철됐던 양국의 축구역사에 월드컵은 또 한 차례 비정한 승부를 요구했다.

그러나 1986년과 98년 두 차례 연속 패배를 설욕하려는 잉글랜드의 의지가 아르헨티나의 노련미를 압도했다. 젊은 잉글랜드 미드필더는 속도와 의욕에서 상대를 크게 앞섰다. 최전방의 에밀 헤스키도 부지런히 움직이며 1차 수비수 역할까지 해냈다.

전반 24분 니키 벗의 롱패스를 받아 문전으로 돌진한 오언이 수비수 세명 사이로 오른발 슛을 날렸다. 볼은 골대를 맞고 튀어나왔다. 오언의 아쉬움은 44분의 페널티킥으로 보상받았다.

후반 아르헨티나의 마르셀로 비엘사 감독은 극도로 부진했던 플레이 메이커 후안 베론을 빼고 신예 파블로 아이마르를 투입하는 초강수를 뒀다. 힘좋은 중앙수비 솔 캠블과 리오 퍼디낸드의 겹수비에 막혀 슈팅 한번 날리지 못하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도 후반 14분 에르난 크레스포와 교체됐다. 총력전이었다.

후반 23분 아이마르의 정면 강슛이 크로스바를 살짝 벗어났다. 이 장면을 시작으로 자존심을 건 아르헨티나의 대반격과 잉글랜드의 힘겨운 지키기가 이어졌다.볼은 숨쉴 틈 없이 잉글랜드 문전을 맴돌았다.

잉글랜드 응원단에서 승리를 확신하는 함성이 삿포로 돔을 울렸다. 전광판에 베론이 하릴없이 머리를 긁적거리는 장면이 비쳤다. 골키퍼 시먼이 길게 킥을 하자 이내 휘슬이 울렸다. 엄청난 함성이 파도처럼 삿포로 돔을 때렸다. 4년을 기다렸던 설욕전의 완성이었다.

'하나님은 데이비드 베컴까지도 용서하십니다'.

98년 당시 영국의 한 침례교회에 누군가가 쓴 글이다. 그러나 베컴이 잉글랜드 팬들에게서 용서받는 데는 4년이 더 걸렸다.

삿포로=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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