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언어 혼란… 한 일간지에 4개국어 동티모르 앞날 걸림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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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동티모르 세관 공무원 아이부토 헤이타스(34)는 일주일에 세시간씩 동티모르 국립대학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포르트갈어를 배우기 위해서다.

"정부에서 공무원들에게 한학기 동안 무료로 강의를 듣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모든 공문서를 포르투갈어로 써야 하거든요."

지난 20일 독립한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은 옛 식민종주국 언어인 포르투갈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인구의 10%뿐이다. 1975년 인도네시아에 점령당한 뒤 학교를 다닌 30대 이하의 젊은이들은 인도네시아어를 구사하지만 윗 세대는 그렇지 못하다.

지방별로 방언이 심해 대표적 현지어인 테툼어로 의사소통이 되는 사람은 인구의 60% 수준이다. 이 때문에 공식 행사에서는 복수의 언어가 사용된다. 지난 20일 독립선포식에서 사나나 구스마오 대통령은 취임사를 영어로 한 뒤 또 한차례 테툼어로 연설했다.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국회의장은 포르투갈어를 사용했다.

수도 딜리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수아라 티모르 로로사이'는 이 나라가 처한 언어의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호부터가 그렇다. '로로사이'는 동(東)쪽을 뜻하는 테툼어고 '수아라'는 '목소리'란 뜻의 인도네시아어인데 같은 뜻의 포르투갈어가 작은 글씨로 나란히 씌어 있다. 또 영어·포르투갈어·테툼어·인도네시아어 등 4개 언어가 기사마다 제각각으로 쓰인다.

동티모르 건국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공식 언어를 결정하는 것이었다.민족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테툼어는 막판에 공용어로 채택되긴 했지만 어휘가 턱없이 부족하고 문법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다.

사용계층이 제한적인 포르투갈어가 공식 언어로 된 것은 제헌의회 의원 등 국가 지도자들의 선택에 따른 것이다. 인도네시아와 싸워 독립을 쟁취한 지도자들에게 포르투갈어는 '저항의 상징'이었다.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 교육을 받은 지배엘리트들은 포르투갈을 모델로 신생국 동티모르의 법과 행정체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선 "왜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지 않느냐"는 불만이 많다. 당장 일자리를 얻는 데 유리한 영어를 배우려는 열기도 높다. 특히 이웃나라 호주의 자본이 동티모르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어 영어에 대한 수요는 점점 더 늘어날 전망이다.

지구촌의 축복 속에 독립국으로 탄생한 동티모르의 앞날에 언어 혼란이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딜리(동티모르)=예영준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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