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 바라는 유권자 아직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서울시내 모 구청장 후보로 나서려는 A씨는 최근 난감한 일을 당했다.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와서 인사하라"는 전화를 받고 찾아간 음식점에는 노인 20여명이 모여 있었다.

자신에게 전화한 사람은 노인들을 대상으로 건강보조식품을 파는 다단계 판매원으로 A씨에게 노인들의 식사값 30여만원을 내줄 것을 요구했다.

A씨는 "전화를 받고 무시하면 인심을 잃을까 싶어 가긴 갔었는데 당황했다. 이같은 전화가 하루에도 한두번씩 온다"고 말했다.

6·13 지방선거 정당 후보의 경선·공천이 막바지에 이르는 등 후보 윤곽이 드러나면서 유권자들의 '손 벌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손 벌리기=강원도 내 기초단체장으로 출마할 계획인 J씨는 사무실로 찾아와 계·동호회 모임 때 홍보해 주겠다며 식사비를 내달라는 요구를 이번주만 두차례 받았다.

J씨는 "모임의 전체 표가 내 표가 될지 불확실한 데다 선거법 위반이어서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지인이 요구할 경우 난감하다"고 말했다.

대전시내 모 단체 대표 閔모(41)씨는 최근 "당선을 돕겠다"며 구의원 후보 예정자 金모(42)씨에게서 체육대회 경비 30만원을 받았다가 金씨와 함께 선관위에 적발됐다.

선거 브로커들도 설친다. 경남 창원시장에 출마하려는 K씨의 선거 사무장 朴모(53)씨는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 선거 브로커들로 골치를 앓고 있다.

"2백여명의 조직을 갖고 있는데 운영자금을 주면 표를 모을 수 있다"는 등 손을 벌리는 이들을 설득해 돌려보내느라 애를 먹는다.

朴씨는 "일주일에 서너명씩 찾아오는 이들을 섭섭하게 대해 돌려보내면 나쁜 소문을 낼까봐 조심해 대하도록 사무실 직원들에게 특별히 지시했다"고 말했다.

◇단속 진땀=중앙선관위에 따르면 지난달 말까지 적발된 불법 사전선거운동 가운데 금품·음식물 등 제공이 전체(3천9백9건)의 30%를 차지한다.

이들 가운데 유권자의 요구에 의한 경우가 적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단속이 쉽지 않다.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금품을 제공한 후보자들이 신고하면 반발을 살까 두려워 입을 다물기 때문이다. 대구시내 모 구청장 출마 예상자인 L씨는 "고발했다간 주민들에게 완전히 찍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경북도선관위 조원봉 지도과장은 "금품을 요구하는 선거 브로커 등을 감시하고 있지만 워낙 은밀히 진행되기 때문에 확인이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포항경실련 徐득수 실장은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를 치르기 위해선 후보자 못지 않게 유권자들의 의식개혁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홍권삼·김방현·백성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