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자만하다 한국서 글로컬리제이션 실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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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호 28면

한국 소비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던 월마트는 진출 9년 만인 2006년 한국에서 간판을 내린다. [중앙포토]

2006년 5월 월마트는 국내 진출 9년 만에 모든 영업권을 이마트에 매각하고 한국 시장에서 철수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춘이 선정하는 미국 500대 기업 순위에서 매출 기준으로 1~2위를 다투는 세계 최대 유통 공룡이 한국에서 고배를 마신 것이다.

실패에서 배우는 경영⑨ 월마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월마트, 재벌이 지배하는 한국에서 빠져나오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미국 재계와 월마트의 시각을 전했다. 이 신문은 월마트의 한국 철수가 산업 전반에 걸쳐 소수의 재벌이 지배하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서 많은 글로벌 기업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도했다. 월마트와 까르푸 등 글로벌 강자들이 한국 시장에서 각각 4위와 5위에 그친 것은 재벌과의 커넥션으로 유·무형의 이점을 안고 있는 토종 업체들과 불공정한 경쟁을 벌인 결과라는 분석도 곁들였다. 즉, 월마트의 영업 방식 등 기업 내부에서가 아니라 재벌 지배라는 외부적 요인에서 실패 원인을 찾은 것이다.

과연 월마트의 철수를 불합리한 경쟁 상황 때문만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외부 여건이 이 회사에 유리하지 않았던 점을 인정하더라도 이게 전부는 아니다. 분명한 것은 월마트가 한국 소비자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철수에 앞서 조 해트필드 월마트 아시아 사장은 “시장 확장을 위해 직원들과 함께 소비자들의 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시장이 우리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소비자에게 다가가지 못했음을 자인한 것이다.

월마트가 한국 시장에 진출한 1998년은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하에 있던 시기다. 월마트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이때를 최적의 진입 시점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먼저 경기침체로 시장에 진입하는 데 필요한 적절한 인수합병(M&A) 대상이 존재할 것으로 봤을 것이다. 또한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는 한국 소비자들이 월마트의 슬로건이자 핵심 전략인 ‘EDLP(Everyday Low Price)’에 매료될 것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실제로 월마트는 당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네덜란드계 할인점인 마크로의 4개 매장을 인수하며 최초 진입에 필요한 거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그들의 글로벌 스탠더드 전략을 한국 시장에 접목시키는 데서 난관에 직면한다. 월마트는 고객이 무엇을 원하느냐보다는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집중했다. 미국·캐나다 등 해외 시장에서의 성공 사례에 기반해 한국 소비자 또한 자신들의 글로벌 정책에 길들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파국은 여기서 비롯됐다.

월마트는 한국 소비자가 ‘비합리적’ 소비자임을 간파하지 못했다. 이는 이마트의 사례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사업 초기 월마트를 모방했지만 곧 국내 대형 할인점의 틀을 정립한 이마트는 한국 소비자의 식문화와 쇼핑문화에 기반한 독특한 모델을 창출해냈다. 대형 할인점은 가격이 저렴할 뿐 아니라 도심에 위치하면서 백화점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으로 인식시키는 전략이 먹혀들었다.

월마트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가격 만족을 위해 질 낮은 서비스와 도심 밖 원거리 이동 등의 불편을 감수하도록 소비자를 길들이려는 기존 전략을 고수했다. 그러나 가격과 서비스의 반비례 관계를 인정하는 서구의 ‘합리적’ 소비자와 한국의 ‘비합리적’ 소비자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가격·서비스·편의 모두의 만족을 원하는 한국적 성향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패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월마트는 또 자신들만의 브랜드 정체성(BI·Brand Identity)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흔히 월마트의 실패 원인으로 꼽히는 매장 내 신선 식품 부족이나 불편한 매장 구성보다 더 큰 실책은 자신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독특함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월마트는 가격 관리에 집중한 나머지 한국 내 조달이 가능한 제품 중심으로 상품을 구성해 국내 할인점과의 차별화가 부족했다. 월마트의 명성을 듣고 먼 길을 나선 고객에게 그에 상응하는 특별함을 제공하지 못했고 이는 결국 고객의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반면 같은 외국계 할인점인 코스트코는 국내 할인점이 갖추지 못한 독특한 상품과 컨셉트를 앞세워 선전했다. 매장의 외관은 물론 화장실 변기까지도 미국 현지 모습을 그대로 구현함으로써 고객이 미국에서 쇼핑하는 듯한 느낌을 갖도록 유도했다. 월마트의 감점 요인이었던 창고형 매장 구조도 코스트코에서는 불편함이 아닌 특별함으로 작용했다. 결국 월마트가 추구했던 ‘매장 형태와 서비스의 글로벌화’와 ‘상품 구성의 현지화’는 한국 시장에서 외국 기업도 국내 기업도 아닌 어정쩡한 이미지를 낳았다. 자신만의 브랜드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결과는 소비자의 외면이었다.

마지막으로 월마트는 한국 시장 진입을 지나치게 서둘렀다. 진출 초기 월마트는 상표권 분쟁에 휘말려 월마트 대신 ‘한국마크로’ 상호를 1년간 사용해야 했다. 신규 시장 진입자로서 브랜드를 알려야 할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 셈이다. 상표권 사용에 따른 문제 발생 가능성에 대한 조사조차도 완벽히 끝내지 않을 만큼 성급하게 시장에 진입한 것은 이후 진행될 불행의 전주곡이었다. 고객 특성에 대한 이해 부족과 월마트만의 이미지를 수립하지 못했던 것도 조급한 결정의 부산물이었다.

모리타 아키오 소니 회장은 세계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을 혼합하는 기업 경영 원리를 언급하면서 ‘글로벌 로컬리제이션(global localization)’을 줄여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ation)’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묶이는 환경에서 사고와 전략은 글로벌하게 행동과 운영은 로컬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월마트는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이미지와 선진화된 시스템을 과신한 나머지 한국 시장에서의 ‘글로컬리제이션’에 실패한 것이다.

국내 기업들의 글로벌 시장 진출이 가속화되고 있다. 해외로 영역을 넓히는 단계에서는 그간 성장기반이 돼온 기업 고유의 기준 외에도 글로벌 스탠더드와 지역화(localization)의 경계를 연계시킨 글로컬리제이션을 제대로 정립하고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 작업이 말처럼 단순하지는 않다. 글로벌한 차원에서 고수하는 원칙과 함께 각각의 지역 특성에 맞춰 정책과 프로세스를 수정하고 재무·회계, 조직, 정보기술(IT) 인프라까지 재정비하는 대규모의 투자와 시간이 요구된다.

월마트는 어쩌면 한국 시장이 이 같은 투자를 하기에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들에게는 한국에서의 실패가 그저 그만한 작은 실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외 진출을 준비하는 많은 국내 기업의 입장에서 그들의 실패는 글로컬리제이션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면서 필승 전략을 수립하는 데 꼭 필요한 처방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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