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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Focus] ‘세풍(稅風)’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 연극인으로 새 인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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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준술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 연극 ‘리회장 시해사건’의 주연은 어떻게 맡았습니까.

“연출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김광림 교수가 경기고 5년 선배예요. ‘화동연우회’라고 경기고 연극반 출신의 극단이 있어요. 20년 전에 생겼는데 제가 창립을 주도했지요. 거기서 김광림 선생과 계속 작업을 했어요.”

● 연출자와의 인연만으로 주연이 됩니까.

“5년 전 ‘코리올라누스’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죠.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에요. 보통 4대 비극을 말하는데 유럽에선 5대 비극에 들어가는 연극이죠. 화동연우회가 초연을 했어요. 그때 김광림 선생이 제 연기를 주목하고 “60대 배우가 흔치 않다”며 이번 주연을 제안했죠.”

● 무대에 자주 섰군요.

“아니에요. 연출 스태프나 카메오(단역)를 빼면 큰 역은 ‘코리올라누스’ 때가 처음이었죠.”

※ 그는 고교 연극반 3년이 모자라, 서울대 법대에서도 연극반 창설을 주도했다. 하지만 “공무원이 되면서 관객으로 구경하는 입장이 됐다”고 했다. 변곡점은 국세청 국장 시절 찾아왔다. “간부가 되니 옛날을 되돌아보고, 그 시절이 문득 그립더라고요.” 망설이지 않았다. 연극을 다시 하고 싶은 동문들을 모았다. 그게 91년 생긴 화동연우회였다.

● 그럼 법대엔 판검사 되려고 간 게 아닙니까.

“아버지가 그걸 원했죠. 저는 예술을 하고 싶었어요. 서라벌예술대에 원서를 내려는데 부모님 반대로 못했죠. 당시엔 원서에 부모님 동의를 받아야 했어요. 결국 서울대 법대에 지원했다 떨어져 재수로 들어갔죠. 공부는 안하고 66년 법대에 처음 연극반을 만들었어요.”

● 예술인으로서 자질 같은 게 있을 텐데요.

“연극은 놀이 아닙니까. 아버지가 일제 때 고등 보통학교에서 응원단장을 했어요. 지금 연세가 아흔셋이신데 술·담배 하시고 소리도 하시고 건강합니다. 우리 말로 ‘한량’ 기질이 있는 분이죠. 저도 그런 기질을 물려받지 않았나 싶어요.”

● 연극에 빠져드는 이유는 뭡니까.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저는 현실에서 못 하는 걸 무대에서 추구하는 게 좋아요. 특히 마지막 공연 끝나고 텅 빈 객석을 보는 게 좋습니다. 어찌 보면 역설적인데, 빈 공간을 보면서 성취감을 느껴요.”

※ 무대에 서면서 “새로운 충만감과 행복감을 느꼈다”는 이씨. 그러나 가족 일에 소홀해 “집에선 잘리기 직전”이라고 하소연했다.

● 연극하면 배 고프다는데 생업은 어떻게….

“세무법인을 운영해요. 국세청 동료들, 지인들과 함께요. 건설회사 일도 돕고 있는데, 회장 직함으로 경영 전반을 챙겨 줍니다.”

※ 여기서 그는 세풍 얘기를 자진해서 꺼냈다. 세풍이 불거지고 98년 미국으로 도피한 그는 2002년 미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돼 국내로 들어와 2004년 4월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미국 미시간에서 1년 반, 서울에서 1년 반 감옥 생활을 했지요.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습니다.” 그림 잘 그리고, 붓글씨 잘 쓰는 부친처럼 그도 ‘손 끝의 기(氣)’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 감옥에서 그림 그릴 마음의 여유가 있었습니까.

“붓으로 그렸죠. 당시 저는 ‘묵’으로 참선을 했다고 얘기합니다. 그때 그린 걸 나름대로 정리해 왔어요. 시기가 되면 전시회도 한번 하고 싶어요.”

● 원래 정치에 뜻이 있었나요.

“관직에 있으면서 세풍으로 사고를 안 쳤으면 정치 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현직 공무원일 때도 정치권 콜을 받긴 했죠. 그쪽에 친구와 가까운 사람들이 많으니 자연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요. 하지만 관료로 성공할 때까진 외도를 안 할 작정이었는데 중간에 사고가 났습니다. 어쨌든 재판에서 불법으로 판결이 났으니 이렇게 다른 길로 가는 거죠 뭐.”

● 연극을 통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까.

“기업들이 목표를 이루면서 편법을 많이 저지르죠. 기업뿐 아니라 어떤 사람이든지 무리해서라도 성취에 도달하려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현실에서 기업이 시종일관 100% 정당하게 하기는 쉽지 않았잖아요. 성취한 다음에 좀 베풀고, 사회에 갚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면 이런 잘못도 상쇄되지 않을까 싶어요.”

● 마음에 남는 대사는 뭔가요.

“마지막 주인공인 리 회장이 죽기 전이에요. ‘모든 게 꿈 같다’는 말로 끝을 맺죠. 정말 꿈 같은 겁니다. 언제 그것을 깨닫느냐의 문제죠.”

그러면서 그는 마지막 대사를 간추려 읊기 시작했다. “인간 중의 신이 있다면 바로 나다. 그래서 모든 걸 가질 수 있고, 무엇이건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이 육신이 10년만 젊었어도 정말 멋지게 할 텐데….”



j 칵테일 >> 여배우 없어 문리대에서 여학생 빌려왔어요

“그게 사실은…. 처음엔 담배가 피우고 싶어서 갔어요. 연극반 학생은 담배를 피우더라고요. 학교 강당의 연습실에 가보니 천장에 작은 방이 하나 있고, 올라 가보니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요. 그날로 가입했죠 뭐.” 고교 시절 추억을 묻자 이석희씨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 청춘 시절, 기억나는 사람들도 많겠습니다.


“손학규(그림)씨가 고교 동창이고 연극도 같이했어요. 원래 밴드부에서 나팔수였는데, 연극반에 오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밴드부 군기가 셌거든요. 결국 밴드부에서 ‘빳다’를 30대 맞고 탈퇴했지요.”

● 법대 연극반의 에피소드도 궁금합니다.

“160명 중에 여자가 1명뿐이었죠. 여자가 없으면 연극이 됩니까. 당시 서울대 문리대가 동숭동에 있어서 거기서 여학생을 빌려서 연극을 했어요. 다들 열정이 대단했죠.”

● 화동연우회 때는 어땠습니까.

“극단 이름인 ‘화동’은 경기고가 있던 동네 이름이죠. 꽃 화(花), 동네 동(洞)에서 따왔어요. 당시 함께한 열혈 단원이 4년 후배이자 학전 대표인 김민기씨였어요. 같이 무척 열심히 했죠.”

● 선배들과의 일화도 많았을 텐데요.

“고교 때엔 특별히 선배 두 분을 따랐어요. 연극·영화인 인 이낙훈 선배와 실험극단 대표였던 김동훈 선배였죠. 둘을 닮아보려고 열심히 연극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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