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진 기자의 오토 살롱] 단출해진 포드그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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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머큐리는 시장 상황만 본다면 진작 철수해야 했지만, 창업주 일가가 설립한 브랜드라 어쩔 수가 없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는가.” 올 초 미국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만난 포드 고위층의 넋두리다. 그런데 불과 6개월 만에 상황이 달라졌다. 포드는 이달 중순 머큐리(로고) 브랜드를 폐기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포드그룹의 브랜드는 대중차인 포드와 럭셔리급 링컨 두 가지만 남았다. 이미 볼보는 중국 길리차에, 재규어·랜드로버는 인도 타타그룹에, 애스턴마틴은 영국 투자회사에 매각했다.

머큐리는 1938년 6월 포드 창업 일가인 헨리 포드의 장남 에드셀 포드가 설립했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머큐리는 달변가이며 판단력이 빠른 ‘상술의 신’이다. 당시 포드는 대중차로 인기를 누렸고, 링컨은 상류층 브랜드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판매를 늘리기 위해선 이 사이를 메울 중간급 브랜드가 필요했다. 포드는 1928년 GM에 1위를 내준 뒤 재도약의 기회를 엿보던 상태였다. 머큐리는 보수적인 포드 브랜드에 비해 모던하고 스타일리시한 이미지로 차별화했다. 에드셀은 머큐리를 통해 ‘자동차 왕국’ 포드의 기틀을 잡았고, 훗날 포드의 ‘제2 창업자’로 평가받았다.

머큐리의 대표 차는 55년 영화 ‘이유 없는 반항’에 등장한 ‘49년형 머큐리’다. 청춘 스타였던 제임스 딘이 몰았다. 67년 나온 스포츠카 쿠가는 미국 머슬카의 아이콘이 됐다. 머큐리는 78년 미국에서 58만 대를 판매하며 전성기를 맞았지만 이후 하향세를 면치 못했다. 지난해 9만2299대를 팔았을 뿐이다. 이런 부진은 어느 정도는 예견된 것이다. 포드 차체와 엔진을 같이 쓰면서 머큐리는 소비자들에게 같은 차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머큐리 대표 세단인 밀란도 포드 중형차 퓨전을 베이스로 한 것이다.

머큐리의 폐지는 보잉 부사장 출신으로 2006년 9월 부임한 앨런 멀럴리 회장이 주도했다. 그는 빌 포드 포드그룹 이사회 회장과 MIT 경영학석사(MBA) 동문이다. 대주주인 포드 일가의 강력한 신임 위에 그는 머큐리 폐기를 완수했다. 멀럴리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브랜드의 해외 매각과 폐기로 포드 재건의 다리를 놓았다. 포드가 잘나갈 때 무려 100억 달러를 들여 사들인 이들 브랜드를 불과 40억 달러에 처분했다. 구입 가격에 연연치 않고 현재의 시장가치를 중요하게 본 것이다. 해외 사냥은 여유가 생기면 다시 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전문경영인이 창업 일가가 관련된 일에 손을 대는 것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멀럴리는 ‘이런 게 미국식 경영’이라고 주장하듯 단호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김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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