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서생 정치의 한계 보여준 하토야마 사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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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정치가 이상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에게 철학은 중요하지만 그것을 현실에 접목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타산(打算)이 필요하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지금도 탐독되는 이유다. 정치인의 자질을 서생(書生)적 문제의식과 상인(商人)적 현실감각으로 요약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혜안이 돋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일본 총리가 어제 집권 민주당 실세인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간사장과 동반 사임했다. 취임 8개월 만이다. 이상주의 정치의 한계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하토야마가 사임한 직접적인 이유는 지지율 하락이다. 취임 당시 70~80%에 달했던 지지율은 최근 10%대로 추락했다. 이대로는 다음 달 실시될 참의원 선거 참패가 불 보듯 뻔하다는 집단적 위기감이 그의 등을 밀었을 것이다. 지지율이 급전직하(急轉直下)한 데는 오키나와의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을 둘러싼 논란이 결정적이었다.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 밖으로 이전하겠다는 그의 공약(公約)은 미국의 강력한 반발로 공약(空約)이 되고 말았다. 동맹국과의 합의와 현지 주민들의 공약 이행 요구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표류하다 결국 제자리걸음을 한 꼴이 됐다. 이 과정에서 하토야마는 정책을 주도하고, 여론을 설득하는 리더다운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

하토야마 정권 출범은 54년 만의 정권교체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았던 것이 사실이다. 미·일 동맹관계의 조정, 우애(友愛)에 입각한 동아시아 공동체 추진, 관료체제 혁신 같은 공약은 큰 주목을 받았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전향적 입장은 한국인들에게도 기대를 품게 했다. 하지만 그는 후텐마 기지에 발목이 잡혀 다른 문제에는 거의 손도 대지 못했다. 현실감각이 부족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토야마까지 연속해서 4명의 총리가 임기 1년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물러남으로써 일본의 정치적 불안정이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장기적 국정 운영이 위협받을 정도다. 노령화와 재정적자 등 일본이 직면한 근원적 도전을 생각하면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일본에 필요한 것은 유능함과 노련함을 겸비한 지도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