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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32)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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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검사의 길

22. 잊지못할 檢事長

최근 폭탄주의 폐해가 많아지면서 검찰에서 폭탄주 마시기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소문이다.

내가 중견 간부였던 시절의 술자리에서는 폭탄주가 거의 빠지지 않았다. 서울지검 공안부장 때 검사들 끼리 어울려 술도 많이 마셨다. 주머니 사정이 그리 여의치 않아 주로 대포집을 찾았다. 함께 근무하던 김경한(金慶漢.서울고검장).임휘윤(任彙潤.전 부산고검장)검사가 여의도에 살았기 때문에 셋은 집 근처의 대포집들을 단골로 정해 놓고 다녔다.

우리끼리 재미있게 술을 먹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은 김석휘(金錫輝)서울지검장이 "언제 한번 끼워 달라"고 해 자주 가는 '남촌'이란 대포집에서 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술은 막걸리, 안주는 빈대떡과 낚지볶음 등이 있는 허름한 집이었지만 金검사장은 대단히 만족한 표정이었다.

요즈음 선배.상사가 저녁식사나 술자리를 제의하면 후배 검사들이 아내와 외식 약속 등을 이유로 꺼리는 풍조가 있다고 들었다. 세태가 많이 변했다. 당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선공후사(先公後私)였다고나 할까.

여담이지만 폭탄주가 검찰에서 유행하게 된 경위는 내가 알기로는 이렇다.

현재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선배 朴모 검사장이 춘천검사장으로 재직시 1군사령부 지휘관들과 회식 때마다 마셨던 폭탄주를 검찰에 도입한 것이 '검찰 폭탄주'의 시초라는 것이다.

나는 폭탄주에 따르는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를 그리 나쁜 술 문화라고 매도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군대나 검찰 같은 조직사회에서 그 것이 쉽사리 없어지지 않고 명맥을 이어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우선 폭탄주는 '분배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어 좋다. 대개 조직사회에서 상하가 술자리를 같이하게 되면 아래 사람들이 윗사람에게 한잔씩 권하기 때문에 지휘관이나 상관들은 초장부터 고역이다. 또 지휘관이 먼저 취해 술자리 분위기가 재미 없어지기도 한다. 술자리는 상하가 동고동락(?)하는 자리가 아닌가.

그리고 폭탄주는 술자리의 분위기를 가장 빠른 시간에 달아 오르게 한다. 많은 참석자가 작은 잔으로 어느 정도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었다고 판단될 때 폭탄주를 서너 잔 돌리면 금새 분위기는 돌변하게 되고 새침데기같이 조용하던 부하의 입도 열린다. 그러한 변화가 금방 눈에 보이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그래서 서울지검 공안부장으로 재직하면서 폭탄주도 많이 마셨지만 검사 생활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선 숱한 사건과 사태에 대처하면서도 일당백(一當百)의 유능한 후배 검사들과 함께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열심히 일했다. 지금 생각하면 휴가도 반납한 채 그처럼 정열적으로 업무를 처리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또 김석휘 검사장이 나를 인정해줘 신명이 났다. 남자는 자기를 인정해 주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도 바친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도 그렇겠지만 서울지검 공안부장은 매일 오전 부장들 가운데 가장 먼저 검사장에게 보고를 한다. 이 독대(獨對)시간에는 전날 발생한 각종 국내외의 정보 보고는 기본이고, 검사장이 서울지방검찰청의 운영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묻기에 매번 조심스러웠다.

특히 특정 검사에 대한 평판이나 다른 부서의 업무 내용 등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 제일 난처했다.

그러나 金검사장은 나의 솔직한 보고와 의견 개진을 흔쾌히 받아 들여 주었다.

무엇보다 공안사건 처리에 있어 대검 공안부와 의견 차이가 있을 때 金검사장은 항상 내 의견을 존중했다. 金검사장은 "프로들의 생각도 별 것 아니구먼…" 이라며 나를 옹호했다.

金검사장과의 공적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교분을 통해 그의 인생관과 검사로서의 자세 등을 배울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김경회 <전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장>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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