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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불 속 만삭의 너구리는 출산을 준비하고 있었다...기자 현장 탐사 서울 야생동물 삶의 현장 3곳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68호 22면

“쉿! 너구리가 임신 중이에요.”
지난 1일 오전 9시 강서구 개화동의 강서 습지생태공원. 올림픽대로 옆 경사면에 조성된 지름 3m 남짓한 개나리 덤불로 다가서자 동행한 서울대 환경계획연구소 우동걸 연구원이 귀띔했다. 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걸어 배를 깔고 엎드려 덤불 안을 응시했지만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움직이지 않을까 30여 분을 지켜봤지만 미동조차 않는다. “출산이 임박한 상태라 움직임이 둔화되고 극도로 예민해져 깊숙이 몸을 감추고 있다”는 게 우 연구원의 설명이다.

고라니 15, 너구리 4, 삵 2마리 서식...습지 곳곳서 발자국과 배설물 발견돼

방화대교 남단과 행주대교 남단 사이에 길게 늘어선 강서구 습지생태공원은 주말 나들이객들로 인해 소란스러웠다. 우 연구원은 “서울에서는 보기 드물게 자연생태계가 잘 보전된 곳”이라고 했다. 숲쪽으로 난 탐방로로 들어서자 이내 갈대숲과 푸르게 우거진 덤불들이 나타났다. 목재를 쌓아 만든 철새조망대에 올라 목을 쭉 내밀고 앞을 바라보자 흰뺨검둥오리가 날개를 푸드덕거린다. 탐방로 한가운데로 접어들자 간간이 손가락 두 개로 눌러 찍은 듯한 발자국이 보였다. 옆에 있던 우 연구원은 고라니 발자국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2008년 12월부터 강서 습지를 모니터링하고 있는 우 연구원은 이곳 너구리·삵 등에게 발신기를 채워 행동패턴을 파악하고 있다. 이동 경로엔 센서카메라를 설치해 놓았다. 현재 발신기를 차고 있는 동물은 임신한 너구리를 포함, 너구리 2마리. 원래 삵도 발신기를 차고 있었으나 지난 3월 올림픽대로를 건너다 죽었다고 한다. 그는 “강서 습지에 김포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고라니 15마리, 너구리 4마리, 삵 한두 마리가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물수리·흰꼬리수리·말똥가리·황조롱이가 겨울철 강서습지를 찾는다고 한다.

너구리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갈대숲 이곳저곳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혹시 고라니가 숨어있지는 않을까 발이 푹푹 빠지는 갈대더미를 헤집어본다. 그때 툭 하고 갈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재빨리 그곳으로 달려가보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소리뿐이다.

준비해온 김밥으로 점심을 때운 뒤 전략을 바꿔 흔적을 쫓아가 보기로 했다. 오후 2시쯤이었다. 머리를 숙여 땅을 훑어보는데 목이 뻣뻣해질 때쯤 발자국이 찍힌 진흙이 나타났다. 진흙길을 따라가자 곳곳에서 선명하게 찍힌 고라니 발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네 손가락을 눌러 찍은 듯한 삵 발자국과 너구리 발자국도 여기저기 널려있다. 방금 지나간 듯 모양에 흐트러짐이 없다. 우 연구원은 “고양잇과인 삵은 발톱을 숨기고 다녀 발자국에 안 찍혀요. 사냥할 때 필요하니까 발톱을 소중히 하는 거죠. 반면에 너구리는 나무열매도 먹고, 새둥지도 뒤지고, 이것저것 잘 주워먹기 때문에 발톱이 덜 중요해요. 그래서 내놓고 다니니까 이렇게 잘 찍히죠”라며 너구리 발자국을 가리켰다. 이들의 발자국을 따라갔지만 발자국 주인을 발견하는 것은 이내 포기해야 했다. 진흙길을 따라 나 있는 발자국이 갈대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숲에는 발자국 이외에도 각종 배설물이 야생동물의 존재를 실감케 했다. 숲 여기저기에 길쭉한 삵과 너구리 배설물, 토끼똥같이 생긴 고라니 배설물이 풀 속에 박혀 있다. 고라니 배설물 하나를 집어 두 손가락으로 꾹 눌러보았다. 촉촉한 감촉이 배설한 지 얼마 안 됐다는 것을 알려준다. 바싹 마른 회색빛 삵의 배설물을 쪼개보니 털이 섞여 있다. 뽑아보니 쥐털이다. 의아해하는 기자에게 우 연구원은 “설치류 밀도가 높은 습지공원에서 쥐는 삵의 주요 먹이”라고 설명했다.

오후 6시쯤 해 저물녘 먼지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갈대숲을 나오는데 눈앞으로 검지손가락만 한 것이 휙 하고 지나가 버린다. 우 연구원이 “장지뱀(도마뱀의 일종)”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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