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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왜 신화·전설인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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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백두산에는 천지를 굽어보며 이 땅과 하늘을 잇는 신성한 나무가 있고 이 나무가 우리나라를 보호해 주고 있다는 상상을 나는 어릴 적부터 했다. 아마 애국가와 개천절 노래를 열창하다가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던지 '단군신화'때문이었던 것 같다.

*** 역사 이전의 역사 이야기

지난해에 내 눈으로 백두산 천지 근처는 곰도,호랑이도, 인간도, 풀마저도 견디기 힘든 고산지대라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백두산을 내려와 끝없이 펼쳐진 노령산맥과 압록강을 따라 긴 여행을 하면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역사유적뿐만 아니라 신화와 전설에 나오는 장소들과 지명들을 접하고 한국계 중국인들의 벽지마을들을 지나면서 멀게만 느껴졌던 '단군신화'가 역사적 가능성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신화는 역사가 쓰여지기 이전의 역사이야기로서 고대인의 은유적 구술에 기초한다. 은유에 동원된 동.식물들은 그들의 자연환경과 종교의식을 반영한다. 따라서 고대사 연구에서 신화와 전설은 귀중한 사료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신화와 전설이 역사적 사실로 속속 증명되고 있다.

중국은 20세기 초 이미 전설 속의 은(殷.商)나라가 허난성 안양(安陽)의 은허(殷墟)발굴로 고대사의 일부가 되었고, 지난 10년 간은 은나라 이전의 하(夏)나라마저 산시성 상주(商州)부근 유적의 발굴로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요순(堯舜)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전 전설 속에 등장하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복희씨와 신농씨의 시대가 역사로 화할 날도 멀지 않았다.

성서고고학(聖書考古學)의 발달은 구약성경의 내용을 역사적 사건, 실제적 장소로 증명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헤로도투스의 여행담 속의 전설로만 알려졌던 고대 이집트의 도시 헤라클리온과 메노피우스가 프랑스.이집트 합동 발굴단에 의해 해저에서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오랫동안 허구로만 치부돼 왔던 남아프리카 럼바부족의 유대인 시조 부바의 전설이 DNA 테스트로 진실로 바뀌고 있다.

고려시대가 남겨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화와 전설의 한 마디 한마디가 우리의 위대한 유산이고 민족의 뿌리를 찾는 길잡이다. 어찌 한국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 성경보다 앞섰다는 사실이 그 중요성에 비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두 역사서에 채 기록되지 못한 우리 역사가 담긴 일본의 『고사기』 『일본서기』 『속(續)일본기』, 고대시집인 『만엽집』, 일본의 옛 지명들과 성명들도 너무나 소중한 역사적 사료다. 지난주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68세 생일 기자회견에서 일본 왕실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으며, 고대 일본문화의 발달에 한국계 이주민 및 초빙학자와 기술자들의 공헌이 크다는 발언을 했다.

그는 일본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이 애써 은폐하려는 사실을 『속일본기』를 인용해 밝히는 용기를 보인 것이다. 그가 언급한 한국계 인물 중에는 분명 일본에 대륙의 문물을 전한 왕인박사도 포함돼 있다. 왕인은 『일본서기』에만 기록돼 있고 한국 측에는 전혀 기록이 없다.

그러나 일본 오사카(大阪)시 주변에는 그의 무덤을 포함한 왕인 관련 유적이 산재해 있고, 한국에도 왕인 출생지와 활동지로 알려진 전남 영암군 구림마을이 있으나 한국의 '정통'역사가들의 외면을 당하고 있다. 또 일부 기독교인들은 동정녀의 잉태와 예수 부활은 믿으면서 단군상의 목을 자르고 다닌다. 이것이 개천절보다는 성탄절이 공휴일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 우리의 것 소중함 일깨워

2001년 한국 출판계의 최대 뉴스가 그리스.로마 신화 관련 서적의 출간 붐이라고 한다. 『람세스』의 성공에 뒤따른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올해 판매부수 30만부에 달했고, 기타 그리스.로마 신화를 다룬 성인용 도서.동화책.만화책들의 번역판들이 활개를 치고, 청소년 텔레비전 퀴즈에도 그리스신의 이름 맞히기가 빠지지 않는가 하면, 심지어 어린이들 사이에 그리스신의 이름을 잘 모르면 왕따까지 당한다고 한다.

정말 부끄럽다. 이제 새해를 맞으며 쓰는 이 짧은 글에서나마 우리의 것의 소중함, 우리 신화와 전설의 역사적 중요성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한다.

金紅男 <이화여대 교수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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