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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언행일치 신념 지킨 '영원한 언론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영원한 언론인'이기를 갈망했던 청암(靑巖)송건호(宋建鎬)선생.

파킨슨 병으로 8년전부터 거동이 불편했던 고인은 폐렴 합병증으로 4년여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지는 등 힘겹게 투병했다. 많은 동료.지인.후배들은 날카롭고 반짝거리던 눈빛의 그가 벌떡 일어나기를 고대했으나 그는 끝내 병을 이기지 못했다.

김태진(金泰振.63.전 동아투위 위원장)도서출판 다섯수레 대표는 "선생님은 한시도 언론인임을 잊으신 적이 없었으며 언론을 떠나서는 그 분을 생각할 수 없다"며 애도했다.

고인이 1975년 3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에서 스스로 물러나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강사로 있을 때였다. 그는 동아사태와 관련해 기자 1백50여명을 해직하라는 회사의 지시에 반발해 "먼훗날 후회하게 될 겁니다"는 말을 남기고 사표를 던졌다.

박정희 정권은 그에게 여러 차례 입각을 권유했다. 그 때마다 그는 "나는 언론인이지 행정가가 아니다"며 한마디로 일축했다. 상당수 언론인이 정.관계로 진출하던 때라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고인은 남에게는 관대했지만 자신에게는 엄했다. '인내와 노력 두가지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 인내야말로 환희에 이르는 길이다'가 그의 좌우명이다. 이는 안중근(安重根)의사의 유훈이다.

그는 술.담배를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 쾌락을 알게 되면 건전한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생활은 소박하고 검소했다. 역촌동 집에서 30년 살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맏딸 희진(熙珍.49)씨는 대학에 합격하고도 학업을 포기하고 취업해야만 했다.

고인은 생전에 인생의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 결코 역사의 진실을 깨닫지 못한다고 역설했다.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개인의 욕심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바꾸고 합리화하는 것을 경계했다.

최민희(崔敏姬.41)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사무총장은 "말과 행동을 같이 하신 분이다. 책이 출판돼 인세(印稅)를 받으시면 후배들에게 돌솥밥을 사주셨다. 지갑에 5만원 이상 들어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고인은 동아일보를 떠난 뒤에는 해방 직후의 현대사 연구에 몰두해 『한국민족주의 탐구』(78년).『한국현대사론』(79년).『한국현대인물사론』(83년)등의 저서를 냈다. 이 무렵 시간이 나면 김구 선생의 묘소를 혼자 찾아 상념에 잠기곤 했다.

하지만 그의 고향은 역시 언론이었다. 84년 해직 언론인을 중심으로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해 월간지 『말』을 창간했다.

이어 한겨레 창간(88년)을 주도해 초대 사장과 회장을 지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역에서 물러난 93년 이후부터 그는 병마에 시달렸다.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과 관련해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은 것에 대해 서울고등법원이 지난 4일 재심청구를 받아들였으나 무죄판결을 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장남 준용(準容.41)씨는 "아버님의 삶은 힘들었지만 그 분은 언론계의 표상이셨고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리고 역사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금관문화훈장(99년).한국언론상(92년).호암상(94년).정일형자유민주상(2000년)등을 받았다. 정부는 언론문화 창달에 기여한 공적 등을 기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키로 했다.

김상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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