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정부의 안이한 대북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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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8.15 평양 민족통일 대축전을 둘러싼 파문을 수습하기 위해 정부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실정법 위반자들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방북요건 강화 방침 등이 그런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파문이 재발되지 않기 위해선 북한당국에 대한 정부의 인식에 변화가 있느냐의 여부에 있다는 생각이다.

'북한당국은 믿을 수 있다' 는 인식이 이번 축전 파문의 한 원인이 됐기 때문이다. 정부가 당초 남측 추진본부의 방북을 허용하게 된 것은 지난 13일 밤 북측 추진본부에서 보내온 팩스 때문이었다.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행사는 북측행사로 하고, 남측대표단은 참관해도 무방하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 정부는 결국 북한에 뒤통수를 맞았다. 행사 참가자들이 귀국 후 "북한 인사들이 행사 참가를 강권(强勸)했다" 고 말한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찌 보면 안이한 정부의 이같은 대북 정책은 지난 3월 이래 중단된 남북대화 재개와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답방에 대한 미련 때문으로 보인다는 게 북한문제 전문가들의 전반적인 분석이다. 그러다 보니 북한의 속셈을 조목조목 따져보지도 않고 눈치나 보는 꼴이 됐다는 것이다. 심지어 공안당국이 3대헌장 기념탑 행사 참가자를 처벌하지 않은 것도 이와 맞물려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결과적으로 각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게 됐고, 남북관계에 나쁜 선례만 남겼다. 민족간 문제를 북.미관계에 견주기는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북한의 변화 유도와 맞물린 미국 정책은 우리에게 반면교사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의 핵무기 포기를 전제로 경수로와 중유를 제공하는 제네바 핵합의를 이끌었다. 북한 미사일협상 때도 철저한 상호주의였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더 철저한 주고받기식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핵.미사일.재래식 전력에 대한 북한의 양보를 전제로 국제 금융기관의 지원 등 빅딜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물론 미국과 한국의 카드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 정부도 때론 건드리면 큰코 다치는 '호랑이' 가 되고, 잔뜩 몸을 웅크린 '고슴도치' 로 변할 수도 있어야 한다. 정부는 "북한에 끌려만 다닌다" 는 지적을 다시 한번 귀담아 보았으면 한다.

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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