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문학상 후보작] 이혜경 '일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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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여기, 영월이라 불리는 한 여자가 있다. 만난 지 열흘 만에 결혼한 남편을 따라 인도네시아로 온 여자, 그 여자에게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그의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식사를 하는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던 아픈 과거가 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인도네시아 여자와 막 사랑에 빠지려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며 애정없는 메마른 결혼생활 속에 잠시 자신의 표류하는 삶을 정박시켜 두고 있다.

이렇게 '일식' ( '문학동네' 2001년 봄호)줄거리를 요약하고 보면 흔해 빠진 불륜 소재의 작품일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은 이런 식의 줄거리 요약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한 여자의 미세하고도 깊이 있는 삶의 음영들을 거느리고 있다.

마음 속의 물기가 다 빠져나가 버린 듯한 건조하고 적요한 문장으로 한 여자의 생이 스쳐 지나가는 삶과 사랑의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는 이 소설 속에서 우리는 마음의 폐허 뒤에 감추어진 생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의 시선을 느끼게 된다.

타인과의 소통을 열렬히 갈망하면서, 동시에 그 소통의 불가능함에 대한 절망으로 타인에 대한 갈망의 흔적들을 지워나가야 하는 삶, 사랑이라는 이름 속에 폐허처럼 자리잡고 있는 타인에 대한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마음의 거리는 지금, 그녀가 견디는, 아니 사실은 우리 모두가 견디어야 할 생의 근원적인 모순이다.

이 작품에서 개기일식이란 바로 생의 그 근원적인 모순의 상징이다. 그녀가 개기일식이 있었던 나라라는 이유만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일시 귀국한 남자와 결혼하고, 개기일식을 보다가 눈이 멀어버린 인도네시아 남자를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들은 그녀가 자신의 삶을 폐허로 만들어 버린 그 어두운 생의 심연을 응시하는 방식이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맨눈으로 보아서, 결국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다니. 달이 해를 가릴 때, 그걸 보다가 망막이 타버려서 마침내 빛의 세계에서 멀어진 사람이 있다니. 그녀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땅, 누군가가 깜깜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아이인지 노인인지도 알 수 없는 그가 잠겨들었을 어둠, 그 어둠으로 잠겨들던 순간이 왜 그리 사무쳤던가" 라는 구절에서 개기일식은 갈망과 절망 사이의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을 표상한다. 가장 밝은 빛과 가장 캄캄한 어둠이 공존하는 자리,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갈망해서는 안될 것을 갈망하는 삶이며, 그 갈망의 대가로 영원한 어둠 속에 추방되어 버린 삶이다.

영월은 그 극단의 빛과 어둠이 겹쳐지는 지점에서 생의 금기를 어긴 대가로 어둠 속으로 추방된 자신의 삶을 위해 오래 참아왔던 눈물을 흘린다. 한국도 인도네시아도 아닌 땅에서 정처없이 헤매는 생의 영원한 무국적자의 눈물, 절망과 갈망이 소용돌이치는 한때의 절박함이 빠져나가 버린 자리에서 솟아나오는 그 눈물은 위로 같이 따뜻하고 깨달음같이 서늘하다.

그러나 마음의 간절함이 훑고 지나간 자리, 삶의 텅 빈 공허와 마주선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눈물 속에는 생의 어두운 바다를 떠다니는 모든 불우한 존재들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연민의 시선이 깃들여 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갈망으로 망막이 타버리는 사무친 결핍의 체험 속에 깊숙이 몸담가 본 사람들이 끌어안을 수 있는 타인에 대한 또다른 사랑의 방식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여자의 삶 속에 깊이 파인 상처자국은 타인에 대한 좌절된 갈망이 생, 그 자체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연민으로 깊어지는 자리였던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낀 생의 근원적인 모순과 결핍을 견디게 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고통으로 감응하는 바로 그 연민의 힘이 아닐까?

박 혜 경

◇ 이혜경 약력

▶1960년 충남 보령 출생

▶82년 '세계의문학' 통해 등단

▶소설집『그집 앞』등

▶오늘의작가상.한국일보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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