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색깔논쟁 두려워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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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최근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색깔논쟁은 한국 정당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색깔논쟁이 정치공방에 그치지 않고 담론의 광장으로 나온 것은 해방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색깔논쟁에 불을 붙인 것은 한나라당 김만제 정책위의장이었다. 그는 하루가 멀다하고 민주당과 그 정책을 '사회주의적' 이라고 공격해댔다. 마침내 전교조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회주의적인 집단" 이라고 발언하기에 이르렀고, 그의 색깔 발언은 이회창 총재로부터 주의를 받은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이 발언은 4.26 재.보선에서 참패한 민주당이 정풍(整風)파동을 거치면서 "전통적 지지층인 중산층과 서민의 지지를 되찾겠다" 고 나선 것과 맞아떨어져 파장을 증폭시켰다. 金의장의 발언은 물론 세련되지 못했다.

정치공세적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 색깔논쟁은 특정정치인을 겨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과거 군사정권 때와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더구나 지금은 각 정당이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해 당의 이념과 정책노선을 분명히 하는 시기다.

그래서 이 공방이 대선전략 차원을 넘어 각 정당의 노선차별화로 이어질 수 있을지 관심을 끌었다. 이런 시도가 성공을 거둔다면 지역정당의 한계를 단숨에 건너뛰어 보수와 진보정당 체제로 도약할 수 있었기에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희망이 결실을 보기는 시기상조인 듯하다. 민주당은 역대 정권에 시달려오면서 형성된 '레드 콤플렉스' 를 정면돌파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일부에서 "이 기회에 정면돌파하자" (정동영 최고위원)는 주장이 없지는 않았지만 "한나라당의 색깔공세에 휘말리면 손해" 라는 것이 주조였다.

물론 정당이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하는 데에는 부담이 없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상당수 국민은 군사독재와 민주화투쟁의 시기를 겪으면서 보수를 수구 혹은 기득권과 동일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 남북 분단이 반세기를 넘어가면서 진보성향의 사람들조차 자신을 사회주의자 또는 사회민주주의자로 자처하길 꺼리는 게 현실이다.

정치권 밖의 풍토도 아직 황량하기만 하다. 이념이 다른 상대방에 대해 논리로 공박하기보다 그 존재조차 부인하려 들었다.

민주주의가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원칙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각계 원로 32인이 최근 성명에서 "진보와 보수 중 어느 한편이 부정되면… 우리사회의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고 지적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원로들의 얘기는 진보와 보수가 사회의 양축으로서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나라당 기획위가 조사해 지난달말 이회창 총재에게 보고한 여론조사 내용은 흥미롭다. 조사결과 '李총재와 한나라당이 현재보다 진보적으로 변해야 한다' 고 응답한 사람이 71.4%에 달했다.

'현재 수준이 적절하다' 가 11.1%, '현재보다 보수적으로 변해야 한다' 가 10.1%였다. 재미있는 것은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전체 평균보다 더 많이 진보적인 변화를 요구(75.5%)하고 있다는 대목이다.

민주당에는 한나라당과는 역(逆)의 논리가 적용될 것이다. 민주당이 서민층의 지지를 확보하고 거기에 보수층을 흡수할 수 있어야 재집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박상천 최고위원이 지난 6일 기자간담회에서 "민주당은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 양날개로 날아야 한다" 고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특정계층의 지지만으로는 집권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는 지난 대선결과가 잘 말해준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손을 잡음으로써 보수층을 끌어들여 집권에 성공했던 것이다.

지역이 아니라 이념과 정책을 보고 정당을 지지 또는 반대할 수 있다면 우리 정치문화는 한걸음 전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당들은 자기 색깔을 내야 한다. 그런 바탕 위에서 상대의 지지층을 얼마나 흡수하느냐가 집권 여부를 판가름할 것이다.

김두우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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