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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이 반한 한국 <2> 뉴질랜드 경찰관 셰퍼드의 백두대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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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 항상 몇 명이 문제지, 코고는 사람들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강원도 태백 매봉산 정상에 선 로저 앨런 셰퍼드.

지리산 국립공원 대피소에는 하룻밤에 200명 가까이 몰려들 때도 있다. 이런 날은 그날 처음 본 사람이라도 나란히 누워 잠을 자야 한다. 그중 몇 명이 늘 문제다. 코 고는 소리 때문이다. 피로에 찌든 등산객이 빚어내는 코 고는 소음으로 비좁은 대피소는 가득 찬다. 대피소에서 밤을 보낼 때의 필수품인 귀마개를 깜빡 잊은 경우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이런 일도 있다. 칠흑같이 깜깜한 대피소의 밤, 누군가 갑자기 비명을 지른다. 무리한 산행을 한 사람이 다리에 쥐가 나 비명을 지른 것이다. 다음에 쿵, 나무 기둥 울리는 소리가 나고 뒤이어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들린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벌떡 일어나다가 나무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머리가 아파서 신음을 낸 것이다. 남의 고통에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대피소 안의 200명 모두에게 웃음을 참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대피소 밤의 하이라이트는 아직 남았다. 머리를 부딪쳐 정신이 없는 사람이 바로 옆에 누운 생면부지의 사람 위로 쓰러진 것이다. 이때는 신경질적인 반응과 욕설이 난무한다. 이렇게 대피소의 밤은 깊어간다.

# 문득 나타나 문 두드리니, 귀신으로 볼밖에

백두대간을 종주하다보면 산위에서 침낭에 온몸을 구겨넣고 비박을 감행해야 할 때도 있다. 지리산능선 위에서 하룻밤을 보낸 아침 풍경. 취침의 잔해가 적나라하게 펼쳐져있다.

가끔은 시골 민박집에서 잠을 청하기도 한다. 온 마을을 깨울 듯이 짖어대는 멍멍이 녀석 때문에 어둠이 깔린 시골 마을에서 몸을 누일 곳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한밤에 대문을 두드리는 낯선 외모의 손님을 향한 시골 노인의 반응은 꽤 흥미롭기까지 하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대문이 열린다. 주인장의 눈에 비치는 건 오랜 산행으로 꾀죄죄해진 백인이다. 소스라치게 놀란 주인은 나에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문을 쾅 하고 닫아버린다. 집주인은 아마 나를 산에서 내려온 희멀건 귀신쯤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주인은 내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작은 문틈으로 나를 조목조목 살핀다. 이 대목에서 나는 엷은 미소를 띠며 가볍게 웃어준다.

이상의 통과의례를 거치고 집으로 들어가면, 웃음과 맥주 한잔이 기다리고 있다. 한국인 특유의 환대와 정을 느끼는 순간이다. 이방인을 향해 그토록 사납게 짖어대던 주인집 멍멍이는 그제야 잠자리로 돌아간다.

# 내 반라 모습에 아줌마들 악다구니 멈추고

하루는 마을 어귀 당산나무 아래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오전 5시30분쯤 됐을까. 시골 아줌마들이 말다툼하는 듯한 소리가 침낭 속까지 파고 들어왔다. 머리를 내밀어보니 반대편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 네 분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잠을 청해 봤지만 아줌마들의 말다툼은 더 격렬해졌다. 도대체 언제쯤 버스가 도착해 이 지겨운 소음이 사라질까. 이토록 이른 시간에 이 먼 시골까지 버스가 다닐 필요가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튼, 내가 일어나야 이 지겨운 설전이 끝나겠다 싶어 침낭 안에서 기지개를 켰다. 인기척을 들었는지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졌다. 나는 속옷 차림으로 침낭에서 빠져나와 스트레칭을 했다. 공중 발차기를 하는 건 내 큰 키(나는 1m80㎝가 훨씬 넘는다)를 드러내는 확실한 방법이다.

아줌마들은 조용히 신호를 주고 받았다. 나는 다리를 긁으며 멍하게 쳐다봤다. 방금 전만 해도 왁자지껄했던 버스 정류장엔 느닷없는 침묵만 흘렀다. 이때 아줌마 한 분이 적막을 깼다. “헬로?” 정중했지만 한편으론 의심스러운 말투였다.

다른 세 아줌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거의 발가벗은 상태에서 말이다. 말다툼은 끝났고, 텅 빈 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줌마들은 키득거리며 버스에 올라탔다. 아줌마들과 나는 서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국의 산에서 기억에 남을 하루를 시작했다.

정리=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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