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비틀스 음악에 과학이?'…신간 '과학콘서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가끔 한국의 일류 인사를 만나보면 나는 그들의 상식 부족 때문에 민망해 거북스러울 때가 많다.

1990년 유명한 문화정책자 한분은 현대미술가 앤디 워홀의 이름을 몰랐고, 같은 해 나에게 현대미술품 수집에 관해 지도를 받고자 찾아온 재벌 부인 일곱명 중에서 재스퍼 존스.로젠퀴스트의 이름을 아는 분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수학과 물리학의 프랙털(fractal) 개념에 금시초문인 것도 당연하다. "

한국의 평균적 지식인들의 지식정보 부족을 지적한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씨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자연과학.인문학.예술 사이의 구분 자체가 없어진 채 굴러가는 지식의 무한게임에 한국이 한참 뒤져 있다는 경고다.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의 서울 전시를 주선하며 던졌던 그의 말은 신간 『과학 콘서트』 에 대한 옹호로도 훌륭할 듯싶다.

그만큼 이 책은 20세기 후반 이후 집중적으로 이뤄진 자연과학 분야의 발견과 경향에 대한 가이드 북으로 성공적이다.

학교시절 배웠던 뉴튼 패러다임의 고전물리학과는 선명하게 구분되는 비(非)선형 물리학이라든지, '복잡성의 과학' 의 등장 등이 그런 예다. 용어가 생경하다 해서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그가 소개하는 현대물리학은 철저하게 '인간의 얼굴' 을 하고 있다. 예전의 고전물리학자들의 관심은 자연과 우주, 즉 너무 거대하거나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 세계에 머물러왔다.

반면 요즘의 물리학은 '사람이 모여 사는 세상' 에 눈을 돌리고 있다. 비틀스 음악과 잭슨 폴록 그림에 숨겨진 프랙털의 구조, 주식이 널뛰는 이유, 백화점의 미로 공간에 숨겨진 상술(商術)등 말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이제 물리학은 사회과학인 경제학의 이론에 끼어들어 '과학의 훈수' 를 두거나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깜짝이론의 카드를 뽑기도 한다.

이런 '복잡한 사회현상의 뒷면에 감춰진 흥미로운 과학이야기' 를 구수하게 들려주는 데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 O J 심슨 살인사건, 서태지에서 할리우드의 줄리아 로버츠까지 종횡무진 등장하는 에피소드도 적재적소에서 빛난다.

이 책이 매력적인 더 큰 이유는 저자 정재승(29.고려대 연구교수)때문이다. 고군분투해 왔던 이인식 이후 스타급 젊은 과학 저술가의 등장을 스스로 우리에게 다시 확인시키고 있다.

최신 과학정보를 암죽으로 만들어 독자들에게 떠먹여주는 재간은 상당한 수준이다. 과장하자면, 이 책 한권은 『네이처』등 일급 과학저널 수십권의 핵심 정리에 해당한다.

책의 구성도 독자들의 낯가림을 배려했다. 제목대로 콘서트 방식이다. '비바체 몰토' 의 제1악장에서 시작해 '알레그로' 의 4악장으로 종료된다. 물론 앙코르도 마련돼 있다. 중요한 것은 콘서트가 '과학 상식' 의 단순 나열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는 고전적 자연과학의 시대는 완전히 갔다는 사실, 즉 새 패러다임을 바탕에 깔고 있다.

저자가 인용한 촘스키의 말을 들어보자. "(기존)과학이란 비유컨대 길 건너편에서 열쇠를 잃어버리고 반대편 가로등 아래에서 열심히 열쇠를 찾고 있는 술 취한 사람이다. "

이말을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고전물리학은 '풀어야 할 문제를 풀기보다, 풀 수 있는 문제만 풀어왔다' . 대신 현대물리학은 고전물리학이 제쳐놨던 '사람이 만들어내는 행동패턴, 즉 복잡한 사회현상' 에 눈길을 돌린다.

그 도구 중의 하나가 프랙털이다. 질서정연한 유크리트 기하학의 잣대로 자연을 단순화해 칼질하지 않고, 보다 유연해진 프랙털의 잣대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프랙털이란 무엇인가. '세부구조들이 끊임없이 전체구조를 되풀이하는 형상' 이 그것이다.

이를테면 눈(雪)의 결정구조나 한반도 서해안의 곡선을 보라. 물감을 정신없이 흩뿌려 만드는 잭슨 폴록의 그림도 그렇다. 그동안 서구과학이 카오스라고 해서 내쳐뒀던 이들 안에는 '보다 복잡한 규칙 내지 패턴' , 즉 자연이 뭉텅이로 숨어 있고, 따라서 이것을 응용해 대도시의 도로망, 헤비메탈 음악, 심장박동의 리듬에까지 접근하려는 것이 현대 자연과학이다.

이밖에도 책에는 파레토 법칙, 케빈 베이컨 게임, 머피의 법칙 등이 무수히 나와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1백25개 항목의 논문 및 웹페이지 주소도 생생한 정보다.

조우석 기자

***정제승은…

***정제승은…

1972년생인 정재승의 초등학생 시절 꿈은 '물리학자' 였다. 따라서 꿈을 성공적으로 이룬 그는 경기과학고를 거쳐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복잡성의 과학' 으로 학위를 받았다.

박사후 과정은 예일대에서 했다. 책에 보이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문장은 어렸을 적 탐독했다는 전파과학사 문고판, '과학동아' , 카뮈의 『이방인』등의 덕을 입은 듯 보인다. 대학시절에는 영화와 철학 동아리의 멤버로 활동한 전방위 호사가다.

그의 역량은 2년 전 저작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에서 입증됐다. '한국출판인회의 우수도서' '과학기술부 인증 우수도서' 등에 뽑힌 이 책은 과학서로는 이례적으로 3만부나 팔렸다.

따라서 이런 기대를 그에게 품어봄직하다. "세계 출판계에 과학의 대중적 글쓰기는 가장 매력있는 장르다. 『E〓mc2』의 D 보더니스, 『개미』의 베르나르 베르베르 같은 특급 저술가가 우리 나라에도 탄생할 수 있지 않겠는가. "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