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이건 기적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지난 경제위기를 고비로 한강의 기적이란 소릴 잘 들을 수 없게 됐다. 기적이 아니라 거품이니, 부실이니 하고들 기가 죽어 있다. 우린 역시 안되는 건가.

자조 섞인 탄식까지. 그러나 분명한 건 지금도 한강의 기적은 진행 중이란 사실이다. 잠시 멈칫거리기도 하고 부침(浮沈)도 있지만 그래도 우린 세계 일류국가를 향해 확실히 가고 있다. 대단한 인내와 슬기로.

보라, 하늘 높이 치솟는 도심의 빌딩숲! 무역센터.인천공항을 가보셨나요. 그 규모와 완벽함에서 감탄이 절로 난다. 이것만으로 기분 좋다. 차가 막혀 짜증이 나지만 이거 정말 기분 좋은 일 아닌가요. 자전거 하나 변변히 못 만들던 우리가? 잘 뚫린 포장도로, 푸른 산, 넘쳐나는 물건, 기억납니까. 텅 빈 구멍가게, 벌건 산, 흙탕길이. 자부와 긍지로 가슴 설레게 했던 88올림픽도 잊진 않았을 것이다.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 위에 우린 정말이지 기적을 일궈낸 것이다. 사회 각 분야에서 엄청나게 발전했다. 말단 공무원의 친절 만인가. 수돗물 시비가 끊이지 않지만 주무부처의 솔직한 자세, 과학적이면서 현실적인 대책수립,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성숙된 모습이다.

참으로 믿음직스럽다. 농사 짓다 빚지면 부채탕감을 해주다니, 얼마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가난은 나라도 못구한다는데.

구조조정 속에 대량실업이 아프다. 하지만 실업률 5% 내외라면 이건 기적이다. 숙소가 불편하다고 안들어가겠다는 노숙자를 모시려고 설득하는 공무원, 우린 정말이지 대단한 나라에 살고 있다.

치안이 불안하다지만 밤길 여자 혼자 나다닐 수 있는 도시가 세계 어디에고 그리 흔치 않다. 다이어트 하느라 돈들이고 고생하는 걸 하늘나라 조상들이 내려다보신다면 얼마나 흐뭇해하실까. 기초 질서가 엉망이라지만 20년 남짓한 도시생활, 이 정도면 기적적으로 잘 하고 있다.

민주화만 해도 그렇다. 그 짧은 역사에 이 역시 기적이다. 절제되고 세련된 맛은 아직 없지만 우린 어쨌거나 자유를 만끽하고 있지 않으냐. 너무 돼서 오히려 걱정이다.

세계화도 잘 되고 있다. 지난 IMF 경제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었다. 촌티가 좀 나긴 하지만 이게 생존의 수단임을 확실히 자각한 것만으로 고맙다. 배낭여행 젊은이가 온세계를 누비고 있다. 기분 좋고 든든하다

반도체만인가. 디지털화는 세계 일류다. 우리가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 분야도 적지 않다.

민주화.세계화.디지털화, 이게 세계 일류국가로 가는 우리의 긴급과제다. 잘 돼가고 있다. 물론 아직은 미진한 구석이 많다. 해서 불평불만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헐벗고 굶주려온 세대로선 오늘의 우리는 정말이지 꿈만 같다.

상승기류를 타고 고공 비행을 해온 세대로선 지금의 저속.저공비행이 답답하고 불만이겠지. 자조적인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역사란 건너뛸 순 없는 것, 다른 나라의 실수.실패는 비켜갔으면 좋으련만 알면서도 그런 전철을 밟아 가는 게 역사의 숙명이다. 먼저 간 나라들이 겪은 민주화 과정의 혼란.과격.부정.부패.강성노조, 겪을 건 다 거쳐야 성숙해 가는 게 역사다.

문제는 얼마나 빨리, 큰 상처 없이 이 힘든 단계를 거쳐가느냐 하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 전문인사들이 비판조언도 하게 된다. 당장엔 듣기 싫은 소리도 있다.

필자도 지난 1년 본란을 통해 선입관을 버리고 세상을 좀 다른 각도에서 보자,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바꿔보자고 말해왔다. 주제넘게 비판적인 면도 있었다. 잘해보자는 욕심에서.

우린 슬기롭다. 조급한 마음에 과격할 때도 있지만 막상 위기에 처하면 인내와 슬기로 잘 대처해왔다. 그게 우리의 역사였다. 그리하여 우린 세계가 놀랄 기적을 일궈내고 있는 것이다.

귀중한 지면을 할애해주신 중앙일보, 그리고 애독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면서 본란을 닫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