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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세상] 국가와 질서 VS 시와 섹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오랜만에 지성의 자유로운 사색을 풀어낸 에세이를 읽었습니다.

에세이의 참맛은 논리나 이론의 틀에 갇히지 않는 지적 성찰의 개방성에 있습니다. 『국가와 황홀』(송상일 지음, 문학과지성사). 제목부터 근엄하면서도 황홀하게 독자를 끌어들이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언론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송씨는 국가 체제의 편인 존재.철학.이름 짓기 등과 체제 해체로 볼 수 있는 무(無).시(詩)와 섹스 등 상반된 것을 편편이 마주보게 합니다.

『국가와 황홀』은 보전하는 것이 국가의 일이라며 국가를 존재의 파수꾼으로 봅니다. 반면 황홀은 국가의 그 존재의식을 해체하며 황홀한 언어인 시, 그리고 섹스는 무에 헌신한다고 보았습니다.

철학.문학.종교 등 여러 분야의 동서고금의 고전을 참조하면서도 얽매임없는 줏대로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짧게 짧게 치고들어가 독자의 지적 탄성을 자아내게 하며 삶과 사회의 깊이를 사색하게 만듭니다.

"철학자와 역사가는 모두 질서를 세우는 사람들이다. 플라톤이 보편적 이데아를 추구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만인의 동의 위에 세워진 국가는 가장 튼튼한 것이다. (중략)추상화.질서화는 통치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절차다.

반면 시인의 입에서 나오는 황홀한 언어는 변덕스런 영(靈)의 말이다. 얼빠진, 그리고 얼을 빼는 말이다. " 해서 플라톤은 자신이 세운 철학적 공화국에서 당연히 시인을 추방한 것 아닙니까.

질서와 권력을 지향하는 공화국에는 연인이나 시인을 위한 자리가 있을 수 없겠지요. 섹스도 시와 마찬가지로 얼을 빼는 무(無)의 황홀한 춤입니다. 기원의 동굴이며 쾌락의 샘인 그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자신의 무화(無化)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시와 섹스의 무의 황홀경에는 시간이 사라지고, 과거와 미래의 사건은 현재의 사건, 영원한 사건이 됩니다. 이 무시간성 때문에 시인은 과거의 비밀을 이야기 하고 닥칠 일을 예언할 수 있다고 송씨는 봅니다.

프랑스 사상가 바슐라르가 외롭게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사색으로 일련의 '몽상의 시학' 을 써내며 시적 상상력을 존재 혹은 철학의 근원에 자리잡게 했듯 『국가와 황홀』도 예지가 번득이는 몽상으로 국가 위에 무의 황홀경을, 시인을 무에서 창조하는 신의 위치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시간의 틈새들을 훔치듯 낚아채며 썼다" 고 송씨는 밝힙니다. 줄곧 제주도 언론인으로 현업에 있었으니 짬짬의 시간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겠지요.

조세희씨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신문사의 바쁜 생활 중 틈틈이 쓰여져 짤막짤막한 연작소설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던 걸 아시는지요.

꽉 짜여 일관된 것보다 그 짬짬의 틈새가 바로 독자가 치고들어가 저자와 함께 사색할 수 있는 구멍 아니겠습니까.

칼럼이나 평론과는 또다른 에세이의 참맛이기도 하고, 결국 그것이 산다는 것의 향기 아니겠습니까.

이경철 문화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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