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극우파의 그릇된 자존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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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이 한밤에 남편은/두만강을 탈 없이 건넜을까" 로 시작하는 김동환(金東煥)시인의 '국경의 밤' 을 두고 고교에선 "어느 여인의 슬픈 사랑과 비극적 삶으로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애환을 그렸다" 고 가르친다.

하지만 눈 내리는 겨울밤, 국경 너머 소금을 밀수출하러 간 남편을 걱정하는 순이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서사시의 전체를 읽어보니 교과서에선 배우지 못한 내용이 보인다. 한국인의 이민족 탄압이 그것이다.

순이는 이른바 재가승(在家僧)이다. 함경도에 살던 여진족의 후손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고려에 복속한 이후 고려.조선인과 구분되도록 머리를 박박 깎고 살도록 강요받았으며 한민족과의 통혼도 금지 당했다.

'국경의 밤' 은 순이가 조선 총각을 사랑했지만 사회적 제약 때문에 결국 동족에게 시집갔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시가 나온 1925년은 제국주의에 맞서 좌파의 국제주의와 우파의 민족주의가 동시에 부상한 시기였다.

김동환은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 민족의 현실을 부각하면서 우리도 혹시 다른 민족을 멸시하고 탄압한, 반성할 점은 없는지를 지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동안 세상이 많이 변하고 글로벌 시대가 열리면서 이젠 민족주의자라고 하면 최소한 서구세계에선 고루한 극우파로 여긴다. 프랑스 정당인 민족전선의 장 마리 르팡 당수가 그렇고 독일의 스킨헤드족(신나치)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과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정당한 것, 또는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과거사를 반성하길 거부한다.

그러면서 자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며 혐오를 부추긴다. 자기 민족의 자존심을 높일 목적으로 과거의 잘못은 덮고 외국인을 탄압하는 것이 현재 서구에 존재하는 극우 민족주의의 실상이다.

이런 유럽에서 최근 민족주의를 둘러싼 설전이 벌어졌다. 3월 중순 우파정당인 기민당의 라우렌츠 마이어 사무총장이 "나는 독일인인 것이 자랑스럽다" 고 말하자 진보적인 녹색당 출신의 위르겐 트리틴 환경장관이 "스킨헤드족의 정서" 라고 비난한 사건이다. 말싸움은 정치문제로 비화해 기민.기사당 연합은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모독했다며 트리틴의 장관직 사퇴를 요구했다.

그러자 요하네스 라우 대통령이 나섰다. 그는 3월 16일 한 방송에서 "애국자는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민족주의자는 다른 사람의 조국을 무시하는 사람" 이라고 말하고 "그래서 나는 민족주의에 반대한다" 고 외쳤다.

이 발언을 두고 기민당은 "국가와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8천만 독일인을 대표할 수 있는가" 라고 공격했지만 시사 주간지 슈피겔이 온라인으로 의견을 조사했더니 대통령의 발언을 지지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지금은 피부 빛깔이나 출생지를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이 함께 미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세계화 시대가 아닌가. 그리고 가해에 대한 반성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청산하는 기본이다. 그런데도 이웃 일본의 극우파들은 과거 반성을 자학사관이라고 내몰며 2차 세계대전 중의 침략사를 부인하는 교과서를 만들었다. 일본은 미래에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주변국 국민의 조국을 무시하려 들지 말고,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채인택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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