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TV 오락프로의 가학증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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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누구든 손쉽게 시청할 수 있는 지상파 방송이라고 해서 모든 프로그램이 '도덕 교과서' 일 필요는 없다. 또 공영방송이건, 상업방송이건 광고 수입이 주 소득원인 현실에서 방송사간 시청률 경쟁은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러나 방송 제작에 참여하는 이들이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망각한 채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도 된다" 고 여긴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다.

최근 지상파 방송들의 경쟁은 선정성 차원을 넘어 출연진 '학대' 로 치닫고 있다. 탈락자를 부활하는 조건으로 매운 고추를 먹게 하고 세게 때린 사람을 승자로 뽑는가 하면(18일 KBS2 '슈퍼 TV 일요일은 즐거워' 의 '굳세어라! 사위야' 코너) 벌칙 운운하며 인기 연예인에게 3백가지 중국 요리를 먹게 하고, 외모에 자신 없는 여성이 고급 레스토랑과 보석가게 아르바이트를 퇴짜맞는 것을 보여준다(17일 SBS '쇼 무한탈출' ). 가학증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MC가 벌칙으로 바지를 벗고 속옷차림을 하는(11일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 자학증까지 보이고 있다.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을 방영해 시청자를 웃게 하는 것은 진정한 카타르시스 효과가 아니다. 가학적 오락 프로그램 시청효과는 카타르시스나 대용만족의 순기능보다 모방 가학증 부작용이 더 큰 것으로 커뮤니케이션 학계는 분석하고 있다.

온 국민을 가학증 환자로 만들 의사가 제작진에게 없다면, 갖은 방법을 동원해 남을 학대하는 것을 곧 나의 여흥거리로 삼는 프로그램은 당장 폐지해야 한다. 학교 폭력이 문제가 되고, '왕따' 로 고통받는 이들이 늘어가는 우리 사회에서 이들 프로그램이 빚을 역작용은 불을 보듯 훤하기 때문이다.

차제에 각 방송사는 편성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오락프로그램들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을 해야 한다. 동시에 모든 오락물의 콘티와 제작물은 반드시 사전모니터를 거쳐 방영하도록 해 프로듀서나 구성작가의 엽기적 착상이 그대로 방영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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