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세상보기] 원자 세계의 조소(彫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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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열심히 끌로 커다란 나무토막의 여기 저기를 깎아내며 멋진 곰을 만들고 있는 할아버지를 지켜보던 아이가 "할아버지, 어떻게 그렇게 멋진 곰을 만드세요" 하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그야 간단하지. 나무에서 곰이 아닌 부분만 깎아내면 된단다" 하고 대답했다.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반도체 제조기술은 나무토막에서 곰을 만들 듯이 실리콘 조각에서 회로 부분만 남기고 원하지 않는 부분을 제거하는 조각(彫刻) 방식이다. D램 반도체 생산에서 세계 1위인 삼성전자가 최근 세계 최초로 개발한 4기가 D램을 만드는 데도 조각 방식이 사용된다.

이 D램의 선 폭은 0.1마이크론(머리카락 굵기의 약 1천분의 1)으로 지금까지 만든 반도체 중에서 가장 작은 선 폭에 해당한다. 보다 성능이 뛰어난 반도체를 만들려면 선 폭을 더 줄여야 하는데 문제는 조각의 방식으로는 원리적으로 그 이하의 선 폭을 얻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원하지 않는 실리콘 부분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레이저의 빛을 사용해야 하는 데, 선 폭이 작아져서 사용하는 빛의 파장과 비슷해지면 빛의 회절이라는 방해 요소가 불가피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삼성전자는 조각 방식에 입각한 마이크로 기술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에 이미 도달한 셈이다. 앞으로 선 폭을 더 줄이고 반도체의 집적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전혀 새로운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

최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전략적 국가주도 3대 과학기술분야로 정보전자.생명과학.나노기술을 지정했다고 한다.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도 진작부터 나노기술을 강조한 바 있다.

나노기술이 무엇이기에 전 세계적으로 떠들썩한 것일까□ 밀리미터는 미터의 1천분의 1이고, 마이크로미터는 밀리미터의 1천분의 1이다.

나노미터는 마이크로의 또 1천분의 1이다. 그러니까 1 나노미터는 1m쯤 되는 유치원 학생 키의 10억분의 1 정도 길이이고, 위의 D램 선 폭의 1백분의 1밖에 안 된다. 반도체의 선 폭을 나노미터 단위로 줄일 수 있다면 컴퓨터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은 자명하다. 구조가 작아지면 일정한 부피에 저장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크게 늘어나고 정보 처리 속도도 빨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노미터는 원자를 불과 10개 정도 늘어놓은 길이이다. 원자 수십 개를 늘어놓은 정도의 폭을 가진 나노 구조는 조각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다.

유일한 길은 원자를 쌓아서 만드는 조소(彫塑) 방법이다. 그렇다고 원자를 늘어만 놓는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니다. 원하는 종류의 원자들을 원하는 순서대로 결합시켜야 한다. 다행히 지난 2백년 동안 화학은 원소들을 다양하게 결합해 다양한 화합물들을 만드는 방법을 익혀왔다. 원자 세계의 조소는 화학의 장기인 것이다.

밀리나 마이크론의 세계와 달리 나노 세계에선 거시 세계와는 전혀 다른 양자역학적 성질들이 나타난다. 따라서 나노 과학에서 물리학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어떤 원자들로 어떤 구조를 만들면 어떤 새로운 유용한 기능이 나타나는지를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나노 구조는 반도체뿐만 아니라 의학.생명공학에의 응용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나노 구조를 활용해 실용적인 부품과 장치를 만드는 데는 재료공학.전자공학.기계공학의 기여가 필요하다. 이와 같이 나노 과학기술은 화학.물리학 등 기초과학과 공학의 여러 분야가 학제간 연구를 통해 엄청난 국부를 창출할 수 있는 21세기의 유망분야다.

아마도 십년 후에는 조각 방식의 반도체는 자취를 감출지도 모른다. 우리도 뒤늦지 않게 나노 과학기술에 효과적인 투자를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효자 산업인 반도체 산업이 종말을 맞을지도 모른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다.

김희준 <서울대 교수.분석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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