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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1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10. 외환관리 마침내 풀다

결국 불발로 그치고 말았지만 외환위기 당시 대한생명이 메트로폴리탄측으로부터 10억달러를 유치할 뻔한 것은 몇십억 달러에 달했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방미(訪美) 성과 가운데 금액면에서 가장 큰 건이었다.

당시 정부 관계자들은 대통령의 방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며 상당히 고무돼 있었다.

대한생명 등이 끌어들인 외자가 재무구조 개선을 통해 금융권의 재편을 촉발할 것이라는 보도가 뒤따랐다.

金대통령 방미 만찬 때 메트로폴리탄의 자회사인 메트라이프의 회장을 헤드 테이블에 앉힌 것도 10억달러 투자를 전제로 한 포석이었다. 존 리드 시티뱅크 회장은 당시 출장 중이라 불참했다.

이에 앞서 1997년 12월 16일 뉴욕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과거 체이스의 서울지점장을 지낸 올리버 그리브즈 메트라이프 국제담당 부사장을 만났다. 당시 그는 대한생명 투자에 관심이 있다고 털어 놓았다.

金대통령의 방미를 1주일여 앞둔 이듬해 5월 하순 이규성 재정경제부장관이 대통령의 방미 준비를 위해 미 금융계 사람들을 미리 만나보고 결과를 알려달라고 해 나는 다시 뉴욕에 갔다.

그리브즈가 이번엔 대한생명에 7억달러를 투자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규성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그 얘기를 하니 반드시 성사되도록 힘써 달라고 당부했다.

이 건은 훗날 외화도피 혐의를 받고 있던 최순영(崔淳永) 전 신동아그룹 회장 조사에 영향을 미쳐 수사가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당시 메트로폴리탄측은 정부의 공적 자금 지원 없이도 자체적으로 이익을 내 15년이면 결손을 메울 수 있다고 밝혔다.

정부에 부담을 지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자체 실사팀을 보내 2백여만달러를 들여 실사도 마쳤다. 다만 다른 보험회사들에 정부가 지원을 하게 되면 동등한 대우를 해 달라고 요구했다.

돌아보면, 이 건은 충분히 성사될 수 있었고, 또 성사시켰어야 할 협상이었다.

97년 12월 첫 청와대 보고 때 나는 "외환관리로는 국제수지 방어가 안 된다" 고 말했다. 김포공항에서 여행자의 호주머니를 뒤지는 것은 아프리카 후진국 수준의 외환관리라고 주장했다.

동석한 김기환(金基桓) 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이사장(현 미디어밸리 회장) 역시 "외환관리를 풀어야 한다" 고 말했다.

YS가 "외환자유화를 해야 한다는 정대사 말이 맞지 않느냐" 고 배석자들에게 물었다. 경제수석을 포함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99년 4월 우리나라가 1단계 외환자유화 조치를 취하자 일본도 외환에 관한 규제를 완전히 풀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어려울 때 외환관리에 의존하지 않고 견뎌내야 외환자유화는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국제수지 적자든 외환 인플레든 외환문제는 외환관리 강화가 아니라 금융.재정정책으로 풀어야 한다.

뉴욕 첫 방문 때 우리가 미 금융계 인사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포항제철의 미 고문 변호사인 버논 조단이 막후에서 접촉을 했기 때문이다.

김만제(金滿堤) 포철 회장(현 한나라당 의원)이 미국에 계속 머무를 수 없어 클린턴 대통령의 측근이기도 한 그에게 부탁을 했던 것이다.

나와 함께 뉴욕에 처음 갔고, 비상경제대책자문위원회 위원을 같이 맡고 있던 金회장은 얼마 후 비상경제대책위로부터 견제를 당했다.

그 무렵 비대위의 한 인사가 내게 DJP연대의 한 축이었던 박태준(朴泰俊) 자민련 총재와 金회장의 껄끄러운 관계를 환기시켰다.

金회장은 당시 내가 뉴욕에 주재하는 것이 좋겠다고 정부에 건의했다. 나는 셔틀처럼 왔다 갔다하겠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때 내 역할이란 외국 투자은행에 대해선 안심제.연락관이었다면 우리쪽에서 볼 땐 정부 실무팀을 데려가 서포트하는 일종의 바람잡이였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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